과학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로 꼽히는 파리 과학산업박물관.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ICM)에서는 만 40세 이하 젊은 수학자에게 필즈상을 수여한다. 필즈상은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릴 정도로 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올해 상을 받은 네 명의 수학자를 포함해 단 60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흥미로운 점은 필즈상 수상자 중 28%인 17명이 프랑스 파리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파리고등사범학교(ENS)같은 파리 교육기관에서 수학을 배웠거나 학생을 가르친 경력이 있다.
지난 9월 6일 파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서 만난 파스칼 어셔 책임연구원은 파리가 수학의 대표 도시로 성장한 이유를 ‘데카르트적 사고’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17~18세기 무렵 프랑스는 르네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철학과 수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재건하며 서양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언과 함께 생각을 요구하는 수학만이 오로지 명증성을 갖춘 학문이라 주장했다. 그의 업적 중에는 수학사에 빛나는 성과물로 꼽히는 ‘음수’를 처음 사용했다는 점이 포함된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서양 수학에서 음수는 단지 상상속의 숫자에 불과했다. 데카르트의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수학과 철학 같은 기초 학문이 발달하게 됐다는 해석이다.
● 기초 과학의 도시 파리의 ‘인재 양성’
데카르트 이후 수학과 과학 교과서를 장식한 걸출한 학자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들은 연구에서 성과를 내는 한편 학교를 세우거나 학생을 가르치며 본인을 뒤이을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20세기 프랑스 수학자 단체인 니콜라 부르바키의 회원이었던 수학자 피에르 까르티에는 “교수가 학생을 뽑을 때부터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며 “학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사제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파스칼 어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책임연구원이 파리 출신 수학자들이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이유를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며 설명하고 있다. 파리=조혜인 기자
정책을 만들고 실현하는 연구 기관이 등장하면서 파리의 전통적이고 순차적인 교육 시스템이 완성됐다. 파리 고등사범학교(ENS)를 졸업한 학생이 파리 종합대를 자연스럽게 진학하는 교육 시스템이 형성된 것이다. 어셔 CNRS 책임연구원은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이 서로 교류하고 유기적 협력이 이뤄지면서 젊은 인재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파리 중심의 라탱 지구는 소르본대와 데카르트대 등 주요 대학과 교육기관, 전문서점, 중고서점, 출판사들이 밀집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을 걷다보면 학교 안에 연구 기관이 함께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선 낯선 모습이지만 이런 구조는 약15년 전부터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해, 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교육 기관과 연구 기관이 하나의 집단을 이룬 구조는 1980년부터 제안된 모델이다.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주요 대학들에서는 이미 기업의 엔지니어,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연구소에 종사하는 연구원들이 함께 어울려 연구 집단을 이루고 있다. 분야별 인적 자원을 교류하는 시스템이다. 하나의 연구 집단으로 묶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 집단 구성원 서로에게 ‘윈-윈’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CNRS는 공동 연구를 가장 많이 하는 과학 연구소로 불린다. 네이처 인덱스에 따르면 2017년 7월부터 1년간 이뤄진 공동연구 건수는 3869건에 이른다. CNRS 제공
● 공동저자 1위의 과학도시의 비법 ‘연구 집단’
파리에서는 유독 기업이나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관련 연구자를 찾아 하는 공동 연구가 많다. 네이처 인덱스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 공저자를 분석한 결과에서 프랑스 파리는 유럽에서 과학자들이 연구협력을 가장 많이 하는 도시로 나타났다. 파리 안에서만 이뤄지는 연구 협력이 한해 1932건으로 가장 많았다.
제어 이론을 연구하는 엠마누엘 트레라 파리 소르본대 수학과 교수는 "공동 연구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 소재한 프랑스 국립우주연구센터(CNES)와 공동 연구를 통해 연구 과정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엔지니어들이 해결하지 못한 수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수학자가 알고리즘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프랑스 대학과 연구기관 간 연구협력을 도식화한 그래프. 원이 클수록 협력 정도가 강하다. 유럽 내에서 가장 많은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도시인 파리는 도시 내에서 연구기관 간에 이뤄지는 협력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네이처 인덱스 제공
연구자들도 적극적이다. 트레라 교수는 “연구자 스스로가 흥미 있는 분야와 접촉해 함께 연구하는 경우는 더 많다”며 “연구의 주제, 방향성을 연구자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과 ‘연구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는다. 연구소에서 연구 과제를 주는 경우도 없고, 연구원이 주제를 선택하면 기간의 제약을 두지도 않는다. 유행하는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연구비를 받는데 제약이 없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모든 연구는 책임자가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연구자들이 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바텀업(bottom up)’ 방식으로 진행된다.
파리는 지난해 유럽위원회가 유럽 도시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례평가에서 ‘창의적 경제성이 높은 유럽 도시’ 1위를 차지했다. 이런 결과는 자유로운 연구를 갈망하는 세계의 연구자들이 파리로 몰려드는 이유를 뒷받침한다.
CNRS 국가위원회에서 5년 간 활동하며 지원자를 뽑는 일을 했던 서혜원 교수는 지리적 위치도 유럽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스트라스부르=조혜인 기자
● 세계 과학자가 파리로 모이는 이유 ‘연구의 자유’
파리의 연구기관들도 외국인 연구자를 고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CNRS의 경우 현재 총 3만3000명의 연구자가 종사하고 있는데 이중 30%가 외국인 연구자들이 차지한다. 국경과 국적을 떠나 독창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는 이방인 과학자들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5년간 CNRS에서 국가위원회로 활동한 서혜원 CNRS교수는 “이곳 연구원이 되면 연구원들에게 최고의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며 “연구 주제와 진행 기간, 공동 연구자와 연구 장소까지 모두 자유니 연구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서 연구원은 “독일에 비해 프랑스는 외국인으로 정규직 자리를 잡기가 비교적 쉽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파리 연구소들은 외국인 연구원을 불러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파리의 과학자들을 해외 연구소로 보내는데도 적극적이다. CNRS는 올해 한국 연세대와 이화여대에 연구소를 열었다.
파리의 과학계는 연구소를 연구자만을 위한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 과학자뿐 아니라 대중을 위한 과학 교육과 지식 공유도 임무로 여긴다. 레미 모나손 푸앵카레 연구소 부소장은 “과학이 연구자만을 위한 것이 되면 안 된다”며 “대중이 과학과 수학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정부와 연구 기관이 밖으로 나와 대중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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