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4일 월요일

겉은 모범생, 마음속엔 병이 자란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ㄱ군은 지난해 특목고 입시에 실패했다. 어릴 적부터 영재로 소문난 터라 ㄱ군과 부모의 충격이 컸다. 일반고에 진학했지만 이곳에서도 1등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시험을 준비하던 ㄱ군에게 갑자기 오른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났다. 정형외과 등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소아청소년정신과에서 ㄱ군은 '가면성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ㄴ양은 서울의 유명 외고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남편과 이혼한 채 혼자서 ㄴ양을 키우는 어머니 ㄷ씨는 딸 자랑이 대단하다. 우등생에 반듯하기까지 해서 빼놓을 구석이 하나 없다고 했다. 그런데 ㄴ양은 최근 우울한 날이 잦아졌다. 학원에 가기 싫다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어떤 날은 유치원 때도 한 번 안 내던 짜증을 ㄷ씨에게 쏟아낸다. ㄴ양이 심리상담센터에서 들은 진단은 '착한아이증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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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억압된 갈등, 신체 이상 일으켜
최근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에 합격했다고 거짓 주장한 한국인 학생이 논란이 됐다. 이와 관련, '리플리증후군'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렸다. 리플리증후군이란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스스로도 이를 진실이라 믿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증상이다. 전문가들은 "자세한 상담 없이 리플리증후군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면서도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인해 정신적 피로감이 컸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또한 "교육열 높은 지역 모범생들에게 비슷한 문제가 많이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겉으로는 우등생인 학생들이 마음의 병을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면성우울증'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이문수 고려대구로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마치 가면을 쓴 듯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억압돼 있던 갈등이 특정한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팔이 마비됐다고 주장한 ㄱ군 사례 외에도 시험을 앞두고 심한 두통이나 복통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점은 아이들이 실제로 통증을 느낀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착한아이증후군'은 모범생처럼 보이려고 갖은 고민을 숨기다가 결국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경우다. 심한 경우 갑자기 폭력적인 태도로 돌변하기도 한다.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뭐든 실수 없이 잘해내려는 학생이나,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아온 아이에게 주로 일어난다. 한부모가정이나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폭발'한 경우도 잦다.

'번아웃신드롬'도 흔히 보인다. 어릴 적부터 사교육에 노출돼온 학생들이 중고교 시절 어느 시점에 마치 기력이 소진(burn-out)한 듯 나가떨어지는 케이스다. 강남의 한 고교에 재직 중인 교사는 "조기 교육이 활발한 강남권에 이런 친구가 꽤 있다"고 귀띔했다. 이연정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아이들의 평균적 발달 단계에 맞춰 설계된 학교 교육과정을 앞서가는 과도한 교육을 강요하다 보면 아이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천근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아이가 선행학습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빨리 그만두고 정상적인 학습을 하도록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리플리증후군도 종종 앓는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높은 학업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라 본다.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괜찮아" 다독임과 인정 필요
앞서 살펴본 증후군 모두 원인은 복합적이다. 환경적으로 학업 부담을 심하게 받고 있는데도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말을 못하다 갈등이 커진 경우가 있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스트레스에 약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부모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모와의 관계가 미성년자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천근아 교수는 "평소 대화를 자주 하면서 자녀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천 교수는 "작은 일에도 아이를 다독여주면 자녀가 나약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이에게 자신감이 생긴다"며 "아이가 스스로 약점을 보완하려고 시도하는 시기가 언젠가 온다"고 설명했다.

이문수 교수는 "부모가 자녀를 '내 인생의 확장판'이라 여기는 것이 문제"라며 "아이가 자기와 분리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모범생 증후군은 과도한 교육열에 휩싸인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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