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23세에 독일 괴팅겐대 의대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개업의로 바쁘게 지내던 코흐는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 에미는 남편의 28세 생일 선물로 현미경을 선물한다. 그런데 이 현미경이 코흐의 인생을 바꾼다. 당시는 탄저병으로 많은 가축이 죽었는데 어느 날 코흐는 우연히 탄저병으로 죽은 양과 소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혈구 주위에 작은 막대기와 이것이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 실처럼 생긴 물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1870년대 독일 볼슈타인의 개업의인 로베르트 코흐는 세균이 가축에서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해 현대의학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최근 병원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의학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이곳에서 코흐는 오늘날 미생물 실험의 기본이 되는, 배지에 콜로니를 배양하는 기법을 개발했고 결핵균(1882년)과 콜레라균(1883년)을 잇달아 발견했다. 코흐는 특정한 세균이 특정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세균이론(germ theory)’의 창시자가 됐고 훗날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코흐는 결핵균 발견 업적으로 19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글 말미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당시 떠오르던 세균이론에 반감을 갖고 있던 막스 폰 페텐코퍼라는 노교수가 코흐에게 콜라라균을 요청했고 배달된 병의 내용물을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린 것. 페텐코퍼는 “세균은 콜레라와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기질이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동물을 자처한 것이다. 놀랍게도 엄청난 양의 콜레라균을 마셨음에도 페텐코퍼는 콜레라는커녕 배탈도 나지 않았다.
책에서 저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페텐코퍼가 콜레라에 걸리지 않은 일은 지금까지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살인적인 세균들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 몸속으로 숨어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들 중 일부만 죽일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가진 이상한 저항성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 병원체는 상대적인 개념?
메르스 사태가 두 달째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주를 고비로 신규 환자수가 줄어들고 있어 수습국면으로 보이지만 아직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전염성이 높은 신종플루 때와는 달리 메르스는 감염력이 낮다보니 개별 환자를 모니터링하는 특수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소식 가운데 가장 특이한 건 메르스의 병독성이 큰 편차를 보인다는 점 아닐까. 기저질환이 없는 사람도 사망하는 사례가 나오는가 하면 한 환자는 퇴원 인터뷰에서 “미열에 잔기침이 났을 뿐 퇴원을 기다리는 게 지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연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무증상이거나 증상이 경미해 신고를 하지 않은 감염자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변이는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똑 같은 바이러스에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어떤 사람은 감염이 된지도 모를 수 있을까.
학술지 ‘네이처’ 2014년 12월 11일자에는 ‘병원체라는 용어를 버려라(Ditch the term pathogen)’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다. 미국 알버트아인슈타인의대 아르투로 카사데발 교수와 리제안느 피로프스키 교수가 쓴 글로,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지나치게 강조한 의학 패러다임이 오히려 전염병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Germ theory’를 세균이론으로 부르는 것도 올바른 번역은 아니지만 사실 ‘germ’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현대의학에서는 병원체라는 용어를 쓴다. 병원체는 세균뿐 아니라 병을 일으키는 모든 미생물(메르스의 경우 바이러스)과 심지어 프리온 같은 단백질도 포함한다.
카사데발과 피로프스키는 “숙주(사람) 없이 미생물 혼자서 질병을 일으킬 수는 없다”며 “질병은 숙주와 미생물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병원체라는 용어가 연구자나 의사의 관심을 미생물에만 집중하게 해 효과적인 치료법의 발견을 방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생물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숙주와 미생물의 상호작용이 숙주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지, 있다면 왜 그런지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무 추상적인 얘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 텐데 패러다임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필자는 최근 ‘Intolerant bodies(불관용의 몸)’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의 역사에 대한 책을 보고 있는데 세균이론 때문에 이 분야의 발전이 늦어졌다는 대목이 나온다. 참고로 자가면역질환이란 면역계가 외부 침입자가 아닌 자기 몸을 공격한 결과 나타나는 병이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경화증과 루퍼스, 류머티스 관절염, 1형 당뇨병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병임에도 1957년에야 자가면역(autoimmunity)이란 용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병의 원인이 늦게 밝혀진 건 병원체가 이들 질환을 일으킨다는 믿음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들 질환은 ‘기질의 병’으로 여겨졌지만 19세기 후반 세균이론이 나오면서 연구자들이 병원체 사냥에 몰두했고 다른 가능성을 시사하는 연구결과들은 무시한 결과다.
다시 기고문으로 돌아와서, 카사데발과 피로프스키는 절대적인 병원체도 없고 절대적인 유익균(또는 무해균)도 없다며 중요한 건 ‘맥락’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아스페르길루스 푸미가투스(Aspergillus fumigatus)라는 곰팡이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무해하지만 백혈병 환자들에게는 중증의 폐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황색포도상구균이 비강에 감염돼도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에서는 아무 증상도 생기지 않는다.
필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가 여전히 환원론적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미생물학자들은 미생물을 변수로 숙주는 상수로 잡고 문제를 다루고, 면역학자들은 숙주를 변수로 미생물을 상수로 잡고 실험을 설계한다. 그러다보니 둘 사이의 다이내믹한 관계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미생물 변수와 숙주 변수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는 분석방법이 개발돼야 한다”며 “아울러 숙주와 미생물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염증반응이나 생화학반응으로 인한 손상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참고문헌을 보면 필자들이 2003년 학술지 ‘네이처 미생물학 리뷰’에 실은 논문이 있는데 미생물 감염으로 일어난 숙주의 손상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감염질환으로 인한 손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미생물이 직접 타격을 입힌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면역계의 과잉반응로 인한 손상이다.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건 면역반응을 강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전염병에서 면역반응세기(가로축)와 환자가 입은 손상(세로축)의 관계는 ‘U’자 형을 보인다. 면역반응이 너무 약하면 미생물에 무너지지만 너무 강해도 자멸하기 때문이다. - 네이처 미생물학 리뷰 제공
● 중용의 길을 찾아서
사실 면역학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나와 남’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서 면역계는 우리 몸을 순찰하며 이물질을 찾아 없애는 헌병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 몸 자체가 수백조 마리의 미생물이 사는 집이다. 즉 기존 패러다임에 따르면 인체거주미생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어렵다.
최근 장내미생물 연구가 급격히 이뤄지면서 이들과 면역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조절T세포를 주목할 만하다. 십여 년 전 교과서를 보면 T세포는 조력T세포와 세포독성T세포 두 가지가 있어 각각 우리가 익숙한 면역작용, 즉 몸 안에 침입한 이물질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조절T세포라는 또 다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절T세포는 전투부대원인 조력T세포나 세포독성T세포와는 달리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급증하는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 같은 면역계 과민 질환의 배후에는 조절T세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학술지 ‘면역’ 6월 16일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조절T세포가 어떤 요인으로 조력T세포로 성격이 바뀌면서 인터페론감마 같은 사이토카인을 대량 분비하면 결국 과도한 염증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면역계가 조절T세포를 제대로 만들게 하는데 장내미생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숙한 조절T세포들은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과도한 염증반응을 억제한다. 최근 아토피 같은 면역계 과민 질환을 타깃으로 한 프로바이오틱스 의약품이 나와 있는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메르스 퇴원자의 분변을 채취해 장내미생물 분포를 조사해보면 증상의 정도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사스 치료에 중의학 도움 돼
결국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건 면역계가 힘 조절을 해가며 분별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모자라면 더해주고 넘치면 빼줘야 한다는 말인데, 이 시점에서 한의학의 철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감염질환의 실체를 몰랐던 시절 한의학은 ‘사기(邪氣)가 침입했다’라는 식으로 감염을 표현했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개별 환자의 상태에 더 초점을 맞춰왔는지도 모른다.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는 말 한마디로 외면하기에는 수천 년 동안 쌓여온 지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현대의학에 쓰이는 약물의 60%는 천연물 또는 천연물을 살짝 변형한 분자이고 대부분 식물에서 얻은 것이다.
2002~2003년 사스 사태 때 중의학과 서구의학을 조합한 치료가 효과적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 표지. 194쪽에 이르는 보고서는 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WHO 제공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전통의학과 서구의학이 각을 세우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보고서는 13편의 세부 보고서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보고서가 종합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길 보면 총 5327명의 환자 가운데 3104명이 조합치료를, 나머지가 서구의학 단독치료를 받았다.
각 보고서별로 상황이 다른데, 2번 보고서의 경우 조합치료를 받은 318명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고 서구치료를 받은 206명 가운데 7명이 사망했다. 중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3번 보고서를 보면 조합치료를 받은 25명 가운데 5명이 사망했고 서구치료를 받은 20명 가운데 6명이 사망했다. 이런 식으로 조합치료를 받은 쪽의 사망률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중의학 처방을 받은 환자들은 전반적으로 증상이 완화돼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의 사용량이 줄어들었고 입원기간도 짧았다. 그만큼 환자들이 덜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치료비용도 줄어들었는데 5번 보고서에 따르면 조합치료의 경우 한 사람 당 7024위안(약 120만 원)으로 서구의학치료만 했을 때인 1만8867위안(약 330만 원)보다 훨씬 적었다.
2009년 신종플루가 지나가고 6년 만에 메르스가 왔듯이 또 언제 어떤 전염병이 한반도를 덮칠지 알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새로 등장한 병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늘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미생물과 숙주의 상호관계’라는 좀 더 넓은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카사데발 교수와 피로프스키 교수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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