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9일 토요일

서술형 시험 대혼란… 교사도 학생도 준비 안돼… 단답형 문제가 90%

문제·채점 기준 애매모호, 일부선 시험前 문제 알려줘

전국 초·중·고교에서 '서술형 시험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 도입된 서술형 시험은 학생들이 단답형 단어가 아닌 논리적인 글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도록 하는 평가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술형 문제 비중을 2010년 30%에서 2011년 40%, 내년 50%까지 확대한다고 지난해 발표했으며, 교과부도 2013년까지 초·중·고교 시험 서술형 문제를 40%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사지선다(四枝選多) 객관식 시험 문제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깊이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서술형 문제의 확대에 대해 교육계에서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찬성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술형 문제가 크게 늘면서 학생은 물론 교사들도 난감해하고 있다.
◆학생·학부모 "채점 주관적이다"

지난해 말 서울 K초등학교에서는 5학년 수학시험 때문에 소란이 벌어졌다. '숫자 12.7과 8을 사용해 수학문제를 만들어 보라'는 서술형 문제 때문이었다. 한 학생이 '철사 12.7kg을 8등분 하면 1등분의 무게는 몇 kg인가'라고 적었는데 이것이 오답(誤答)처리가 됐다. '철사는 가볍기 때문에 kg으로 단위를 쓰면 안 되며 철근이라고 해야 맞는 답'이라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었다. 한 학부모는 "채점 교사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논란이 많았던 문제"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작년 S초등학교 4학년 국어시험에서는 '내가 바라는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라는 8점짜리 서술형 문제가 출제됐다. 시험이 치러진 뒤 학생과 학부모들은 "채점 기준도 제시되지 않고, 도대체 뭘 쓰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A중학교 2학년 과학 시험에서는 '제주도에서 귤을 잘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을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문제를 접한 한 과학고 교사는 "농업문제인지, 과학문제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본지가 서울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 서술형 시험 문제 10개를 한국교육개발원에 제시한 결과, 모두 "적절치 않은 문제"라는 답이 나왔다. 공통된 지적은 질문이 모호하고 채점기준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교 "논란 없애려 90%가 단답형 문제"
서술형 문제가 제출하는 쪽이나 푸는 쪽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편법이 동원되고 있다. 서울 S초등학교 작년 5학년 기말고사 과학문제에서는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그림을 보여준 후 렌즈이름을 쓰는 문제가 서술형 문제로 출제됐다. 교과부의 한 장학관은 "단답형 문제를 서술형이라고 출제하는 것은 제도를 도입한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많은 학교에서 작년부터 단답형 문제를 서술형 문제라고 포장해 출제하고 있다. 이유는 '정답 시비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한국교총이 올 1월 전국 초·중·고교 교사 4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교사 82.2%(366명)가 "서술형 시험이 도입되면 단답형 문제 위주로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고 대답했다.

교사들은 그 이유에 대해 '시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37%), '채점 결과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문제제기가 부담이 돼서'(36%), '채점으로 교사 업무부담 증가'(25%)라고 대답했다. 서울시내 한 중학교 교사는 "아이들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서술형 문제의 90% 이상을 단답형으로 출제한다"고 말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서술형 시험문제는 미리 알려주고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한국교육개발원 김태완 원장은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워주자는 도입취지와 다르게 학교 서술형시험이 논란의 소지가 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며 "문제 출제를 더 연구해야 하며 채점 공정성을 위해 답안지를 교사 여러 명이 교환채점하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다형(型) 시험을 없애고 서술형 시험을 도입하는 것은 세계적인 교육 추세다.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 비판력, 분석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미국 교육부는 2014년 가을학기부터 초·중·고교에서 선다형 시험을 퇴출시키겠다고 지난해 발표했다. 3억3000만달러(약 3600억원)를 들여 단순 지식을 묻는 객관식 시험을 버리고 실생활 속 문제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실용적 학력평가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새 시험은 우선 영어와 수학 과목에 적용될 예정이다. 미국 교육계는 “새 시험이 도입되면 학생들은 광범위한 지식과 다양한 사고를 기르게 될 것”이라며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평가기준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프랑스 등 유럽국가에서는 서술형 시험이 학교시험과 입학시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객관식 시험이 평가의 중심이 되는 국가는 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라고 한국교육개발원측은 말한다.

OECD(국제협력개발기구)도 3년마다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를 2015년부터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그동안 읽기·수학·과학 등에 대한 객관식 학력평가가 중심이었으나, 앞으로 이 시험에서 학생들의 문제해결 능력평가를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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