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종의 무기는 '열린 귀'였다
젊은 군주 세종이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노(老)대신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부왕인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상태에서 2인자의 길을 걷는 것도 어려웠고,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 운운하는 길재와 같은 신하들의 존재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과제는 세종보다 2~30년씩 나이가 많은 노회한 대신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고려 말부터 혁명과 건국 등 시대의 격변을 겪어낸 그들이 보기에 세종은 태종 이방원과 달리 그저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애송이에 불과했을 수 있다.
즉위 초년 박은·허조 등이 세종에 대해 보였던 데면데면한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황희는 왕보다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59세였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윤회가 39세로 세종보다 열일곱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실세인 상왕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노대신들의 마음을 청년 세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세종이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부지런히 묻고 경청하는 일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는 왕의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위 제일성이 "의논하자"였던 것인데, 세종은 대신들을 수시로 불러서 나라에 도움되는 절실한 말을 강직하게 말해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토론하다가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곧 해당 부처에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는 조처도 신하들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됐다.
세종의 탁월한 지적 리더십 역시 신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세종은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국정회의를 매달 5회꼴로 열었는데, 신하들은 국왕의 해박한 유교 경전 및 역사 지식에 감탄하곤 했다. 특히 그는 회의 때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면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고 다독거리곤 했다. 학문에 있어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세종의 인격에 신하들은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신하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뛰어났다는 점이다. 1425년 정월의 종묘 제사 때 허조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한 예다. 당시 허조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였는데,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가 그만 실족해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급히 다가가 한 말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였다.
허조가 황망한 가운데 다시 계단 위에 올라와 사죄를 하자 세종은 “계단을 넓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려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이어서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계단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보다 28세나 연상으로 줄곧 ‘태종의 사람’을 자처하던 허조가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바뀌게 된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대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세종의 강점경영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장·단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들을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왜 그가 적임자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1428년에 황희가 뇌물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았을 때가 좋은 예다. 세종은 정승이란 자리는 나랏일의 대체(大體)를 알고 많은 인재를 추천해야 하는 관직인데, “경은 나랏일에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귀신같이 그 해법을 제시하는 능력이 있고, 인사나 형벌을 의논할 때는 실로 저울대와 같다”면서 황희의 사직상소를 되돌려주었다. 그가 맡은 관직의 핵심 조건과 함께 그의 장점을 함께 이야기해 주어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게 한 것이다.
허조와 김종서를 중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허조에게 “경은 강직하고 정직한 자질을 타고났다”면서 지금 사직하면 장차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고 나라 풍속을 진작시키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이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전회의에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집요하게 지적해서 바로 잡는 그의 역할을 높이 산 것이다. 그뿐 아니다. 김종서를 북방의 영토경영 책임자로 맡기면서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및 여진족과 빈번이 영토문제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함경도의 국방 책임자로서 과거의 사례를 잘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을 결단하는 능력을 가진 김종서의 강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중요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왜 그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세종 시대의 많은 신하가 때로 과로사의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맡은 일을 완수한 것은 그 같은 존재 인정과 두터운 신뢰 때문이었다. 허조가 임종 때 “지금까지 나는 국가의 일을 나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며 “나와 같은 죽음은 아마 내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강점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명의 명령’만 있고 ‘임명의 말씀’이 없이 고위직 관료들을 자리에 앉히고 경질하는 요즘의 인사 관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바로 나의 가능성을 찾고 인정해준 분들이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해준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들이 있게 된 것이다. 신하들의 강점을 인정하고 살려준 세종의 멘토 리더십이 그의 탄생일을 기려서 정한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더욱 그리워진다.
조선일보
젊은 군주 세종이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노(老)대신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부왕인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상태에서 2인자의 길을 걷는 것도 어려웠고,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 운운하는 길재와 같은 신하들의 존재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과제는 세종보다 2~30년씩 나이가 많은 노회한 대신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고려 말부터 혁명과 건국 등 시대의 격변을 겪어낸 그들이 보기에 세종은 태종 이방원과 달리 그저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애송이에 불과했을 수 있다.
즉위 초년 박은·허조 등이 세종에 대해 보였던 데면데면한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황희는 왕보다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59세였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윤회가 39세로 세종보다 열일곱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실세인 상왕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노대신들의 마음을 청년 세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세종이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부지런히 묻고 경청하는 일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는 왕의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위 제일성이 "의논하자"였던 것인데, 세종은 대신들을 수시로 불러서 나라에 도움되는 절실한 말을 강직하게 말해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토론하다가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곧 해당 부처에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는 조처도 신하들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됐다.
세종의 탁월한 지적 리더십 역시 신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세종은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국정회의를 매달 5회꼴로 열었는데, 신하들은 국왕의 해박한 유교 경전 및 역사 지식에 감탄하곤 했다. 특히 그는 회의 때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면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고 다독거리곤 했다. 학문에 있어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세종의 인격에 신하들은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신하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뛰어났다는 점이다. 1425년 정월의 종묘 제사 때 허조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한 예다. 당시 허조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였는데,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가 그만 실족해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급히 다가가 한 말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였다.
허조가 황망한 가운데 다시 계단 위에 올라와 사죄를 하자 세종은 “계단을 넓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려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이어서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계단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보다 28세나 연상으로 줄곧 ‘태종의 사람’을 자처하던 허조가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바뀌게 된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대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세종의 강점경영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장·단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들을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왜 그가 적임자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1428년에 황희가 뇌물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았을 때가 좋은 예다. 세종은 정승이란 자리는 나랏일의 대체(大體)를 알고 많은 인재를 추천해야 하는 관직인데, “경은 나랏일에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귀신같이 그 해법을 제시하는 능력이 있고, 인사나 형벌을 의논할 때는 실로 저울대와 같다”면서 황희의 사직상소를 되돌려주었다. 그가 맡은 관직의 핵심 조건과 함께 그의 장점을 함께 이야기해 주어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게 한 것이다.
허조와 김종서를 중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허조에게 “경은 강직하고 정직한 자질을 타고났다”면서 지금 사직하면 장차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고 나라 풍속을 진작시키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이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전회의에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집요하게 지적해서 바로 잡는 그의 역할을 높이 산 것이다. 그뿐 아니다. 김종서를 북방의 영토경영 책임자로 맡기면서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및 여진족과 빈번이 영토문제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함경도의 국방 책임자로서 과거의 사례를 잘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을 결단하는 능력을 가진 김종서의 강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중요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왜 그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세종 시대의 많은 신하가 때로 과로사의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맡은 일을 완수한 것은 그 같은 존재 인정과 두터운 신뢰 때문이었다. 허조가 임종 때 “지금까지 나는 국가의 일을 나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며 “나와 같은 죽음은 아마 내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강점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명의 명령’만 있고 ‘임명의 말씀’이 없이 고위직 관료들을 자리에 앉히고 경질하는 요즘의 인사 관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바로 나의 가능성을 찾고 인정해준 분들이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해준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들이 있게 된 것이다. 신하들의 강점을 인정하고 살려준 세종의 멘토 리더십이 그의 탄생일을 기려서 정한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더욱 그리워진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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