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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버드 내 메모리얼 교회 앞에서. 2 경쟁에 쿨하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는 치열한 하버드 동료들과.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에서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한국 중·고교생들에게 꿈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박원희씨(23)는 2004년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하버드·프린스턴·스탠퍼드 등 미국 명문대 10곳에 합격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6월 경제학 학사와 통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성적우수자들에게 주는 ‘매그나 쿰 라우데 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현재 하버드대 교육혁신실험실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언어 장벽 때문에 고생 오히려 동료들과 친해지는 계기 돼 그는 2004년 9월, 겁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민사고 출신 ‘공부벌레’답게 하버드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첫 학기는 쉽지 않았다. 외국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에겐 무엇보다 언어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 “수업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일상회화는 따라잡기가 힘들었어요. 흑인 영어, 히스패닉 영어 등은 익숙지 않았고, 미국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 등 문화적 지식도 없었으니까요. 타국에 와서 바보 취급을 당하니 열등감이 생겼죠.” 대화가 안 되니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다. 1학년 때 활동한 아카펠라와 기독교 동아리에서 몇몇 친구를 만났지만, 그마저도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누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한다” 칭찬을 들었지만, 미국에서는 그저 미숙한 영어를 쓰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숙제가 넘쳐 따로 영어를 공부할 형편도 아니었다. “식사 시간 동안 미국 아이들이 의사소통하는 법을 관찰했어요.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거나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좋게 받아들였죠. 실수로 놀림받을 때 화내기보다 웃으며 뜻을 물으니, 저와 친구가 되려는 아이들이 많아졌어요. 부족한 점이 오히려 소중한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어가 다소 편해지고 나니 학교생활이 하나둘 차분히 눈에 들어왔다. 우선 놀란 점은 하버드 학생들이라고 모두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책임만 다하면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기에, 수업에 빠지거나 파티를 즐기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열정을 아낌없이 태울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박씨에게 하버드 생활은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영감을 줬다. “하버드에는 수학·과학·인문학 모두에 능통한 천재가 있는가 하면 평범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공부하는 노력파 학생도 많아요. 장학금을 받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아프리카 학생도 있고 페루의 빈민에게 희망이 되고 싶은 의학대학원 지망생도 있었죠. 또 하버드 친구들은 학과 공부를 하면서 노숙인 문제, 난민 문제 등 자신만의 관심사에 열심이었어요. 오히려 무작정 학점에 매달리면 공부벌레(nerd)나 패배자(loser)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죠.” 경쟁에 ‘쿨’한 점도 뜻밖이었다. 박씨는 중·고교 시절 치열한 경쟁을 겪었다. 특히 민사고 재학 시절에는 신경전도 대단했다. 그의 노트를 여러 번 빌려갔던 한 친구는 담임교사에게 “원희는 너무 이기적이에요. 혼자 좋은 성적 받으려고 절대 노트를 빌려주지 않아요”라고 말해 박씨가 교사에게 혼난 경험도 있다. 그로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 명문인 하버드대는 더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은 친구의 성공을 가식 없이 축하했고, 다른 이의 재능도 시기하지 않았다. 하버드에서의 경쟁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었다.
하버드 우등생 박원희 공부 노트
“상대평가로 학점이 매겨지는 과목의 시험을 봤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친구들에게 ‘시험을 망친 것 같다’고 했는데, 의외로 99점이 나왔죠. 그런데도 친구들은 유쾌하게 축하해줬어요. 한국에서라면 매장당할 일이죠(웃음). 하버드 친구들은 점수 경쟁보다 자신이 수업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배웠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친구에게 모르는 내용을 가르쳐주는 데도 주저함이 없죠.” 민사고 졸업 당시 그는 줄곧 “하버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해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다”고 밝혔다. 하지만 입학 후 그는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하버드에서는 전공을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직접 부딪치기 전과 후, 학문에 대한 흥미가 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1학년 때 유전자학 수업을 들으며 실험을 하는데, 재미있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경제학은 어려운 과목일수록 재미있고 더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2학년 때 전공을 바꾸게 된 거죠.”
하버드에서 맛본 진리 추구의 기쁨, 경제학 교수가 꿈 경제학을 공부하며 ‘진리’에 대한 목마름도 커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명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교수들은 “하버드에는 멍청한 질문, 쓸데없는 질문이란 없다”면서 이미 통용된 명제나 이론에도 질문하기를 촉구했다. 그는 중국 호구제도가 학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쓰며, 진리 탐구를 위한 공부에 심취하게 됐다. “하버드는 과정을 강조하는데, 자연히 그 교육철학에 맞춰 공부해야 했죠. 예컨대 서술식 시험을 준비할 때는, 친구들과 함께 토론과 반박을 통해 주장의 오류를 깨치는 식이었어요. 수학과 과학도 공식은 도구일 뿐 생각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죠.” 박씨는 어릴 때부터 공부잘 하는 아이였다. 타고난 영민함도 있었지만 어머니 이가희씨(47)의 영향이 컸다. 이씨는 독서교육과 맞춤교육에 신경 썼다. 호기심 강한 아이의 기질에 맞춰 한 학기 앞서 관련 책을 읽게 했다. 또 도전에 대한 내성을 길러주기 위해 각종 대회에 나가도록 했다. 딸의 유학계획도 각종 자료를 섭렵하며 직접 세웠다. 그는 최근 국내에 이는 입학사정관제 붐에 대한 조언을 건넸다. “리더십을 강조하는 활동,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활동, 그리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활동을 하세요. 최근 입학사정관 전형이 늘어나면서 마구잡이로 많은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의 색깔을 정해야 자신의 ‘브랜드’를 학교에 홍보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04년 ‘공부9단 오기10단’이라는 책을 낸 그는 하버드대 졸업과 함께 ‘스무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김영사)를 펴냈다. 두 번째 책을 내는 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인생 경험 부족한 어린 나이가 민망했고, 행여 해외유학을 조장하는 인상을 줄까봐 걱정됐다. 그럼에도 책을 쓴 것은 하버드에서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는 “하버드에 가서 꿈을 갖게 됐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법을 깨쳤다”며 “입시로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큰 시야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씨의 꿈은 경제학 교수다. 꿈을 위해 지금은 ‘배움’에 매달리고 있다. 학점 따는 것은 쉽지만 그보다는 어려운 수업을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하고자 한다. 그렇게 배우고 성장해야 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그는 자신의 롤모델인 18세기 영국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마쳤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한 사람이에요. 아무런 지원 없이 19년간의 노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이뤘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저도 소신을 갖고 제 길을 묵묵히 걷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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