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논술 문제 중에는 제시문을 3개 이상 비교하는 문제가 종종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문이 3개 이상일 때는 제시문 2개를 비교할 때처럼 비교할 수가 없다.
제시문 가, 나, 다를 비교할 때 가와 나를 비교하고 나와 다를 비교하고 가와 다를 비교하면 우선 글이 너무 복잡해진다. 특히 2개 제시문을 비교할 때처럼 항목을 나누는 것은 더구나 불가능하다.
3개 이상의 제시문을 비교하는 일은, 각 제시문을 요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된다. 답안의 형식은 “제시문 (가)는 이런 말을 한다. 그에 반해서 제시문 (나)는 이런 주장을 한다. 한편 제시문 (다)는 이런 주장이다.” 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3개 제시문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3개 제시문을 “제시문 (가)와 (다)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제시문 (나)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정리한다면 이는 뭔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답안이 된다. 또 (가)와 (다)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면 두 제시문 중에 하나는 필요 없는 제시문인 셈이다. 이렇게 답안에 어떤 균형감이 없다면 “더 나은 답안을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입 논술에서 출제되는 제시문이 3개일 때는 제시문 간의 관계가 ‘변증법’의 관계일 경우가 많다. 그러면 제시문이 3개 출제된 기출 문제를 풀어 보자.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시오.(700자 내외)
(가) 기아에 시달리는 먼 나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고찰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나는 이런 시각을 강한 사해동포주의로 보고 그에 대해 약한 사해동포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약한 사해동포주의도 강한 사해동포주의처럼 하나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약한 사해동포주의에서도 인간사의 옳고 그름은 민족과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척도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다른 모든 조건이 일치한다면, 에티오피아 농부가 겪는 기아와 폴란드 농부가 겪는 기아는 똑같이 나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기아가 똑같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이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할지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이지 않다. 행위의 주체로서 나는 어느 한쪽을 먼저 도와야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그 사안에 대한 도덕적 행위의 이유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어린이 실종 사건을 들기로 한다. 실종된 어린이가 어느 집 자식이건 상관없이 그 사건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그들과 실종된 어린이 사이의 친소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내 자식이 실종되었다면 나는 모든 시간과 공력을 들여 자식 찾기에 전념해야 한다.
내게는 자식을 찾아야 할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는 본능적 욕망 이상의 도덕적 의미가 내포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 관계 때문에 나는 자식을 찾아야 할 분명한 도덕적 이유를 갖는다. 실종된 어린이가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 그 어린이에 대한 내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자식에 대한 책임이 남의 집 자식에 대한 책임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다. 어린이 실종 사건은 어떤 경우든 똑같이 나쁘다고 보는 도덕적 판단과, 실종된 어린이에 대한 친소 관계에 따라 발현되는 내 행동의 도덕적 이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군의 의무들을 다른 일군의 의무들보다 엄격하게 우선시하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가 갈등을 빚을 때마다 국지적 의무를 먼저 이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다면 지구적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안은 논리적으로 그럴싸해 보여도 도덕적으로는 부적절하다.
이 제안에 따르면, 자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입증만 된다면 타국민에게 무제한적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 용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국민에게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외국인을 살해하면서까지 자국민에게 신체 장기를 이식시키는 행위가 용납될 수는 없다. 이 경우,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구적 의무가 자국민에 대해 가지는 의무에 우선한다.
그렇다고 지구적 의무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도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상황에서 백신 보유고가 충분치 못할 경우, 정부가 독감에 취약한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정부는 연령이나 그 밖의 적절한 기준에 따라 독감 취약 집단을 선정하고 외국인들보다 그 집단에 백신을 우선 공급할 수 있다. 예방 접종 대상자로 선정된 자국민보다 외국인들이 독감에 더 취약할 뿐 아니라 그들이 소속된 국가로부터 백신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하더라도, 정부가 자국의 접종 대상자를 우선시하는 것은 여전히 타당해 보인다.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 중 어느 한쪽에 엄격하게 우선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이 적절치 못하다면, 그 다음으로 사안에 따라 양자를 저울질해 보자는 제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경우 어떤 의무에 대한 최종적 가치는 의무의 심각성, 그리고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매겨진다.
여기서 의무의 심각성은 사안의 내용에 따라 결정되고,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은 의무와 관련된 사람들 사이의 친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어떤 경우에는 신중한 도덕적 판단을 위한 모형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경우에 타당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그가 처한 상황이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절망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그를 돕는 의무를 저울질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끼리 강한 의무감을 지니지만, 소수의 동료와 압도적 다수의 외국인 사이에서 후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혜자의 규모에서 볼 때, 소수의 동료에 비해 다수의 외국인에 대한 의무의 심각성이 현저히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출 경우,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소수의 자국민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다수의 외국인을 먼저 구제하자는 제안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에 두루 통하는 도덕적 기준은 더 복잡한 구조로 구축되어야 할 것 같다. 양자 중 어느 한쪽에 우선권을 부여하거나 양자의 의무를 저울질하자는 제안이 그러한 도덕적 기준이 되기에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약한 사해동포주의는 다음 두 가지 주장을 그 내용으로 한다.
첫째, 원칙적으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전체 인류에 대한 의무는 다르다. 동료 시민들에 대한 경우와는 달리 전체 인류에 대해서 우리는 복지와 고용 기회 등과 같은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아울러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적 차원의 질서를 더 평등한 관계로 재편해야 할 의무도 없다.
약한 사해동포주의도 강한 사해동포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아에 시달리는 먼 나라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지만,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가 동일하다고 보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기준들을 지구적 차원에서 옹호해야 한다. 이 경우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를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들을 파괴했다면, 우리가 초래한 해악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보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아울러 우리가 초래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나라의 사람들이 인권과 같은 최소 기준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국제사회의 요청에 따라 그 나라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의무도 우리에게 있다. 비록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인간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 전쟁을 피해 고향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독서와 사색에 빠져서 가족들을 무심히 대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 사무쳤다. 고아는 배고픔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헐벗은 노파는 이불도 없이 밤새 웅크려 있으며, 몹쓸 병에 걸린 자들이 허리를 조아려 구걸을 해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나는 이들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탄식 속에 지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괴로운 것일 뿐 나와는 무관한 일인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동요시키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나에게 있는 지각이 천지의 기(氣)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맥이 온몸에 통하듯이 모든 사람은 천지의 기와 연결되어 있다.
자석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데 지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야말로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온 세상 모든 인류는 나의 동포이다. 겉모습은 서로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책을 통해 저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고 세계 곳곳에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고 여러 나라의 예술을 향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가 진보하면 우리도 진보하고 퇴보하면 우리도 퇴보하며, 그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그들이 처참해지면 나도 처참한 심정이 된다.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끌어당기니 내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난세에 태어나 계급과 인종과 남녀 사이의 억압으로 인한 세상의 괴로움을 목격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大同)의 도(道)야말로 모든 사람을 이러한 괴로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대동의 도를 이루자면 차별을 낳는 가족이나 국가 역시 없애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가족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되며, 불우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질병과 추위, 굶주림과 무식함을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있으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를 착취하며 결국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참혹한 지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족과 국가의 구별을 넘어 온 세계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천 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이천만 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 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 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되어 가고, 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 동료애보다 조국애가, 그리고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심의 거리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을 제각기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랑이라는 동일한 집합의 양적 확장에서 나타난 산물로 여긴다. 즉 강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여러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단 하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증대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 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 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 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라)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문제는 원래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고, 이 제시문들을 참고하여 공감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50점. 1400자. 2009고려대 정시)라는 문제 중에 앞 부분만 떼어낸 문제다.
문제가 원래의 형식대로 출제됐더라도 이렇게 두개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을 따로따로 해결하는 과정이 논술 문제 풀이에는 필수적이다. 이 전에 제시문 가를 500자로 요약하는 문제가 있다.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이 제시문들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 제시문을 요약해야 한다. 제시문 (나)는 무엇인가?
제시문 (나)는 ‘공감의 확장’을 주장한다. (나)의 주인공은 가족들을 무심히 대하면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반면에 제시문 (다)는 ‘공감의 축소’ 혹은 ‘공감의 집중’을 주장한다. 인간은 ‘지금-여기’에 속박된 존재이므로 공감의 확장은 무의미한 일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시문 (라)는 무엇인가? 많은 수험생들이 제시문 (라)를 제시문 (다)처럼 공감의 축소라고 해석한다. 제시문 (나)처럼 공감의 확장이라고 보는 수험생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제시문을 온전히 해독하지 못한 관점이다.
제시문 간의 관계를 설정하려면 먼저 각 제시문을 잘 요약해야 한다. 제시문 (라)는 한편의 시인데, 이 시는 맨 마지막 줄에 핵심이 요약돼 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이다.
이는 공감의 집중을 통한 공감의 확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제시문 (나)와 (다)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답안>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극단적으로 확장된 공감을 갖고 있다. (나)의 주인공은 가족들을 무심히 대하면서 고아나 헐벗은 노파 등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쓴다. 그러면서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 있고 천지의 기와 필자의 지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국가를 없애는 등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의 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는 공감의 집중을 주장한다. 공감의 무한한 확장은 별 의미가 없으며 사랑의 대상과 사랑을 주는 사람간의 의미상의 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다)는 주장한다.
(라)는 제시문 (나)와 (다)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라)는 인간이 ‘지금-여기’에 속박돼 있지만, 세상에 대한 공감을 확장하는 것이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라고 (라)는 노래하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는 것이다. (647자)
이런 식으로 답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원 문제의 뒷부분, 즉 “공감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는 부분은 제시문 (나) (다) (라)중에 한 관점을 택하여 이를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답해야 하겠다. 제시문 (나)처럼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고, 제시문 (다)처럼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가장 절실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제시문 (라)처럼 이 둘의 통합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주장은 결정된 셈이니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나 사례를 창의적으로 동원하여 논리를 전개하면 되겠다. 예컨대 제시문 (라)의 입장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은 식의 답안을 쓸 수도 있겠다.
<예시답안>확실히 사람은 ‘지금-여기’에 속박되는 존재이고 또 ‘지금-여기’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가족의 문제, 자기가 속한 직장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문제가, 예컨대 먼 아프리카 사람들의 기아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지워진 이런 짐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인류애를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그러나 단순히 ‘지금-여기’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라도 가능하다. 오직 인간만이, 가까이에는 없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종’의 안위를 생각한다. 이런 ‘인간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인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감의 대상을 늘려가는 것은 도덕적 실천의 범위를 늘려가는 바탕이 된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는 바로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 대승불교는 “성불(成佛)을 한 생 연기하더라도 대중을 구하리라”는 자세를 보이고 소승불교는 “내 한 몸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두 이론 모두에,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구원 의지가 동시에 깔려있다.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과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642자)
혹은 국제기구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한비야씨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제시문 (나)의 ‘인류애’를 주창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부모님 이야기를 쓰면서 가족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이 부분에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조선일보
제시문 가, 나, 다를 비교할 때 가와 나를 비교하고 나와 다를 비교하고 가와 다를 비교하면 우선 글이 너무 복잡해진다. 특히 2개 제시문을 비교할 때처럼 항목을 나누는 것은 더구나 불가능하다.
3개 이상의 제시문을 비교하는 일은, 각 제시문을 요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된다. 답안의 형식은 “제시문 (가)는 이런 말을 한다. 그에 반해서 제시문 (나)는 이런 주장을 한다. 한편 제시문 (다)는 이런 주장이다.” 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3개 제시문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3개 제시문을 “제시문 (가)와 (다)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제시문 (나)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정리한다면 이는 뭔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답안이 된다. 또 (가)와 (다)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면 두 제시문 중에 하나는 필요 없는 제시문인 셈이다. 이렇게 답안에 어떤 균형감이 없다면 “더 나은 답안을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입 논술에서 출제되는 제시문이 3개일 때는 제시문 간의 관계가 ‘변증법’의 관계일 경우가 많다. 그러면 제시문이 3개 출제된 기출 문제를 풀어 보자.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시오.(700자 내외)
(가) 기아에 시달리는 먼 나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고찰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나는 이런 시각을 강한 사해동포주의로 보고 그에 대해 약한 사해동포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약한 사해동포주의도 강한 사해동포주의처럼 하나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약한 사해동포주의에서도 인간사의 옳고 그름은 민족과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척도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다른 모든 조건이 일치한다면, 에티오피아 농부가 겪는 기아와 폴란드 농부가 겪는 기아는 똑같이 나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기아가 똑같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이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할지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이지 않다. 행위의 주체로서 나는 어느 한쪽을 먼저 도와야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그 사안에 대한 도덕적 행위의 이유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어린이 실종 사건을 들기로 한다. 실종된 어린이가 어느 집 자식이건 상관없이 그 사건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그들과 실종된 어린이 사이의 친소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내 자식이 실종되었다면 나는 모든 시간과 공력을 들여 자식 찾기에 전념해야 한다.
내게는 자식을 찾아야 할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는 본능적 욕망 이상의 도덕적 의미가 내포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 관계 때문에 나는 자식을 찾아야 할 분명한 도덕적 이유를 갖는다. 실종된 어린이가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 그 어린이에 대한 내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자식에 대한 책임이 남의 집 자식에 대한 책임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다. 어린이 실종 사건은 어떤 경우든 똑같이 나쁘다고 보는 도덕적 판단과, 실종된 어린이에 대한 친소 관계에 따라 발현되는 내 행동의 도덕적 이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군의 의무들을 다른 일군의 의무들보다 엄격하게 우선시하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가 갈등을 빚을 때마다 국지적 의무를 먼저 이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다면 지구적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안은 논리적으로 그럴싸해 보여도 도덕적으로는 부적절하다.
이 제안에 따르면, 자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입증만 된다면 타국민에게 무제한적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 용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국민에게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외국인을 살해하면서까지 자국민에게 신체 장기를 이식시키는 행위가 용납될 수는 없다. 이 경우,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구적 의무가 자국민에 대해 가지는 의무에 우선한다.
그렇다고 지구적 의무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도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상황에서 백신 보유고가 충분치 못할 경우, 정부가 독감에 취약한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정부는 연령이나 그 밖의 적절한 기준에 따라 독감 취약 집단을 선정하고 외국인들보다 그 집단에 백신을 우선 공급할 수 있다. 예방 접종 대상자로 선정된 자국민보다 외국인들이 독감에 더 취약할 뿐 아니라 그들이 소속된 국가로부터 백신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하더라도, 정부가 자국의 접종 대상자를 우선시하는 것은 여전히 타당해 보인다.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 중 어느 한쪽에 엄격하게 우선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이 적절치 못하다면, 그 다음으로 사안에 따라 양자를 저울질해 보자는 제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경우 어떤 의무에 대한 최종적 가치는 의무의 심각성, 그리고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매겨진다.
여기서 의무의 심각성은 사안의 내용에 따라 결정되고,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은 의무와 관련된 사람들 사이의 친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어떤 경우에는 신중한 도덕적 판단을 위한 모형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경우에 타당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그가 처한 상황이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절망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그를 돕는 의무를 저울질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끼리 강한 의무감을 지니지만, 소수의 동료와 압도적 다수의 외국인 사이에서 후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혜자의 규모에서 볼 때, 소수의 동료에 비해 다수의 외국인에 대한 의무의 심각성이 현저히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무 대상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출 경우,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소수의 자국민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다수의 외국인을 먼저 구제하자는 제안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에 두루 통하는 도덕적 기준은 더 복잡한 구조로 구축되어야 할 것 같다. 양자 중 어느 한쪽에 우선권을 부여하거나 양자의 의무를 저울질하자는 제안이 그러한 도덕적 기준이 되기에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약한 사해동포주의는 다음 두 가지 주장을 그 내용으로 한다.
첫째, 원칙적으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전체 인류에 대한 의무는 다르다. 동료 시민들에 대한 경우와는 달리 전체 인류에 대해서 우리는 복지와 고용 기회 등과 같은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아울러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적 차원의 질서를 더 평등한 관계로 재편해야 할 의무도 없다.
약한 사해동포주의도 강한 사해동포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아에 시달리는 먼 나라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지만,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가 동일하다고 보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기준들을 지구적 차원에서 옹호해야 한다. 이 경우 국지적 의무와 지구적 의무를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들을 파괴했다면, 우리가 초래한 해악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보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아울러 우리가 초래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나라의 사람들이 인권과 같은 최소 기준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국제사회의 요청에 따라 그 나라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의무도 우리에게 있다. 비록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인간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 전쟁을 피해 고향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독서와 사색에 빠져서 가족들을 무심히 대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 사무쳤다. 고아는 배고픔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헐벗은 노파는 이불도 없이 밤새 웅크려 있으며, 몹쓸 병에 걸린 자들이 허리를 조아려 구걸을 해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나는 이들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탄식 속에 지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괴로운 것일 뿐 나와는 무관한 일인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동요시키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나에게 있는 지각이 천지의 기(氣)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맥이 온몸에 통하듯이 모든 사람은 천지의 기와 연결되어 있다.
자석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데 지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야말로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온 세상 모든 인류는 나의 동포이다. 겉모습은 서로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책을 통해 저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고 세계 곳곳에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고 여러 나라의 예술을 향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가 진보하면 우리도 진보하고 퇴보하면 우리도 퇴보하며, 그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그들이 처참해지면 나도 처참한 심정이 된다.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끌어당기니 내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난세에 태어나 계급과 인종과 남녀 사이의 억압으로 인한 세상의 괴로움을 목격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大同)의 도(道)야말로 모든 사람을 이러한 괴로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대동의 도를 이루자면 차별을 낳는 가족이나 국가 역시 없애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가족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되며, 불우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질병과 추위, 굶주림과 무식함을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있으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를 착취하며 결국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참혹한 지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족과 국가의 구별을 넘어 온 세계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일본인 천 명의 익사나 러시아인 이천만 명의 기아에 관한 기사도 내 아내의 베인 손가락과 위통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찡그린 표정만큼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분명 먼 곳의 불행과 가까운 곳의 불행은 우리 마음에 서로 다른 파장을 일으키고, 모든 인간적 사랑과 공감, 그리고 가치 부여는 관심의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이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확산되어 가고, 그와 더불어 사랑의 가치도 증대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애보다 동료애가, 동료애보다 조국애가, 그리고 조국애보다는 인류애가 더욱 가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사랑도 보편화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심의 거리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을 제각기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랑이라는 동일한 집합의 양적 확장에서 나타난 산물로 여긴다. 즉 강도와 양상을 달리하는 여러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단 하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증대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사랑의 가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범위가 커질수록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거리도 벌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집합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가치들도 주변화 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는 인격적 가치로 간주되던 것이 더 확장된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속한 집합의 크기나 그 집합에 속한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의미상의 거리이고, 그 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이다.
물론 인류 공동체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더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정말 그런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은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더 작고 더 친밀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며, 공동체 각각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가까운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저 먼 인류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은 인류보다 구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개인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민족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라)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문제는 원래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고, 이 제시문들을 참고하여 공감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50점. 1400자. 2009고려대 정시)라는 문제 중에 앞 부분만 떼어낸 문제다.
문제가 원래의 형식대로 출제됐더라도 이렇게 두개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을 따로따로 해결하는 과정이 논술 문제 풀이에는 필수적이다. 이 전에 제시문 가를 500자로 요약하는 문제가 있다.
제시문 (나) (다) (라)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이 제시문들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 제시문을 요약해야 한다. 제시문 (나)는 무엇인가?
제시문 (나)는 ‘공감의 확장’을 주장한다. (나)의 주인공은 가족들을 무심히 대하면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반면에 제시문 (다)는 ‘공감의 축소’ 혹은 ‘공감의 집중’을 주장한다. 인간은 ‘지금-여기’에 속박된 존재이므로 공감의 확장은 무의미한 일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시문 (라)는 무엇인가? 많은 수험생들이 제시문 (라)를 제시문 (다)처럼 공감의 축소라고 해석한다. 제시문 (나)처럼 공감의 확장이라고 보는 수험생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제시문을 온전히 해독하지 못한 관점이다.
제시문 간의 관계를 설정하려면 먼저 각 제시문을 잘 요약해야 한다. 제시문 (라)는 한편의 시인데, 이 시는 맨 마지막 줄에 핵심이 요약돼 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이다.
이는 공감의 집중을 통한 공감의 확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제시문 (나)와 (다)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답안> ‘공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극단적으로 확장된 공감을 갖고 있다. (나)의 주인공은 가족들을 무심히 대하면서 고아나 헐벗은 노파 등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쓴다. 그러면서 남의 불행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仁)이 있고 천지의 기와 필자의 지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국가를 없애는 등 모든 차별을 없애는 대동의 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는 공감의 집중을 주장한다. 공감의 무한한 확장은 별 의미가 없으며 사랑의 대상과 사랑을 주는 사람간의 의미상의 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속박된 인간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애보다 조국애가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다)는 주장한다.
(라)는 제시문 (나)와 (다)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라)는 인간이 ‘지금-여기’에 속박돼 있지만, 세상에 대한 공감을 확장하는 것이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라고 (라)는 노래하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는 것이다. (647자)
이런 식으로 답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원 문제의 뒷부분, 즉 “공감과 도덕적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는 부분은 제시문 (나) (다) (라)중에 한 관점을 택하여 이를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답해야 하겠다. 제시문 (나)처럼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고, 제시문 (다)처럼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가장 절실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제시문 (라)처럼 이 둘의 통합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주장은 결정된 셈이니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나 사례를 창의적으로 동원하여 논리를 전개하면 되겠다. 예컨대 제시문 (라)의 입장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은 식의 답안을 쓸 수도 있겠다.
<예시답안>확실히 사람은 ‘지금-여기’에 속박되는 존재이고 또 ‘지금-여기’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가족의 문제, 자기가 속한 직장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문제가, 예컨대 먼 아프리카 사람들의 기아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지워진 이런 짐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인류애를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그러나 단순히 ‘지금-여기’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라도 가능하다. 오직 인간만이, 가까이에는 없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종’의 안위를 생각한다. 이런 ‘인간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인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감의 대상을 늘려가는 것은 도덕적 실천의 범위를 늘려가는 바탕이 된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는 바로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 대승불교는 “성불(成佛)을 한 생 연기하더라도 대중을 구하리라”는 자세를 보이고 소승불교는 “내 한 몸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두 이론 모두에,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구원 의지가 동시에 깔려있다.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과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642자)
혹은 국제기구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한비야씨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제시문 (나)의 ‘인류애’를 주창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부모님 이야기를 쓰면서 가족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이 부분에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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