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3일 일요일

논술 공부 시작하려면 논술이 무엇인지 정체를 파악하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하자. 이런 질문에는 어떤 형식의 답이 가능한가?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야 한다” 혹은 “사람은 자기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 등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마디로 답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답은 논리의 요소를 다 갖춘 완성된 문장이어서 다른 문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체의 뜻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완성된 문장을 쓰고 난 다음에, ‘착하게 산다는 것’, ‘배려하면서 산다는 것’ 혹은 ‘자신의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어떤 뜻인지 설명하면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질문에 다르게 답하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지. 그런데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야. 그렇지 않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어.
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야.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의미가 있으려면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지 않으면 안돼.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과 같아. 그 의미를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삶이 끝났을 때 그 삶의 의미는 소멸하지.
그러니까 타인에게 의미있는 삶은 타인을 위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해. 어떤 사람은 신에게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렇다면 사람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을 배려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돼.
그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주고, 그들이 세상에 또 선을 베풀면 나는 결과적으로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공헌을 많이 하면 할수록 나의 삶은 개체의 죽음을 넘어 인류의 존재와 함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겠지.”
이 글은 논술문일까? 그렇다. 자신의 주장이 글의 어느 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부분은 이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의 연결이 논리의 연관성을 위주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이 글의 논술적 성격을 더해 준다.
그러나 글의 순서, 글의 전개 방식은 논술적이라기보다는 수필적이다. 예컨대 첫 문장 “사람은 언젠가는 죽지”는 문제가 묻고 있는 사항을 온전히 답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 문장들을 계속 읽어 가다가 밑줄친 문장을 읽어야 비로소 필자의 답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쓰는 방식은 논술의 방식은 아니다. 이 글을 논술문답게 쓰려면 밑줄 친 부분을 맨 앞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 다음에 이 문장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글을 재구성해야 한다.
특히 대입 논술 수험생은 이렇게 해야 한다. 수많은 답안을 채점하는 채점관에게 처음부터 논지를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자신을 각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논술문은 대체로 문제에 관한 생각을 다 마치고 결론부터 씀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전달하는 형식을 띤다. 반면에 수필은 생각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이런 면에서 논술과 수필은 그 목적은 같을 수도 있지만, 방향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수필가는 보통 글을 쓰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반면에 ‘논객’은 논술문을 쓰기 전에 치열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논술문을 쓰는 것은 사고의 과정과 역방향이기 때문이다. 생각 가는 대로 쓰는 글은 훌륭한 수필은 될 수 있어도 훌륭한 논술문은 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신문의 칼럼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칼럼은 보통 어떤 주제에 관련한 주장을 담은 글이다. 따라서 논술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논술문의 형식을 파괴하는 칼럼도 있다. 칼럼에 수필의 성격을 가져온 칼럼이다.
이런 칼럼은 독자에 따라 “읽기 쉽다”,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주장이 선명치 못하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이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수필의 성격이 칼럼에 필수적인 ‘속도감’과 ‘논리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럼에 수필의 성격을 가미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칼럼이 수필의 성격을 띠면서도 독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필자의 ‘필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