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우리나라 수학교육 100년의 교훈


100년 전 교과서로 살펴본 수학교육의 의미

수학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핵심적 밑거름 역할을 해왔다. 세계사를 통해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나라들은 대부분 수학의 중요성을 인식해 수학 및 과학의 진흥에 힘썼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자국의 수학 발전을 위한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세계가 지식기반사회로 들어서면서 수학 역시 국가 경쟁력의 허브(Hub) 학문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더구나 현대 수학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경제, 금융, 군사, 정치, 사회, 문화 등 많은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농업중심사회로서 토지 측량 및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 산술을 매우 중요시한 조선에 서구식 수학이 도입된 건 1880년대 중반부터였다. 2014년 4월 한국수학사학회에서 펴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수학교과서 분석 연구’를 참고해 우리나라에 처음 서양 수학을 도입한 수학교과서의 서문들을 비교해보면 당시에는 어떤 목적으로 수학 교육이 행해졌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개화기 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교과서들. ⓒ ScienceTimes
개화기 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교과서들. ⓒ ScienceTimes
1895년(고종 32년) ‘소학교령’이 제정되면서 학교 교육 속의 수학(또는 산술)은 전면적으로 유럽식으로 개편되었다. 서양식 교육제도의 시작을 알린 소학교령에서는 수학교육의 목표 및 내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일용계산을 익히고 동시에 사상을 정밀히 하고, 유익한 지식을 주는 것을 요지로 삼는다. 심상과(3년제)에서는 처음에 10 이하의 수에서 시작하여 1만 이내의 범위에서 가감승제와 통상 소수를 교수하는 것이 가하다. 심상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행하지만 그 병용은 지역의 사정에 의해서 정한다.
고등과(2년제)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병용하고 주산에 있어서는 가감승제의 연습, 그리고 필산에서는 도량형․화폐․시각에 관한 계산문제로부터 점진하여 간단한 비례문제와 통상의 분수 및 소수를 교수하지만 수업연한에 따라 더 복잡한 비례문제까지 취급하여도 가하다. 산술의 교수는 이해력을 정밀히 하고 운산(運算)에 익숙하여 그것을 자유로이 응용할 수 있도록 힘쓰고, 또 정확한 말로 운산의 방법과 이유를 설명하고, 겸하여 암산에도 숙달하게 함을 요한다.”
1900년부터 수학교과서 간행
한국 수학사상 이때 비로소 필산과 주산이 교육기관을 통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바로 그해 전통적인 유학교육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성균관도 교육과정의 개편을 단행해 이수과목 중에 산술을 두었다. 당시 설립된 사범학교 및 중학교 등의 근대식 학교에서도 수학을 가르쳤으며, 1900년부터 1911년 사이에 14종의 수학 교과서가 간행됐다.
그중 1900년에 초판이 간행된 ‘정선산학(저자 : 남순희)’은 매우 인기를 끈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간행된 유럽계의 ‘신수학’을 재편집한 이 책은 계산의 사칙부터 기하․삼각법․측량 등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정선산학의 서문을 보면 “산학을 배우는 목적이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는 것이니 진실로 격물치지 하려면 산학을 놔두고 무엇을 가지고 하겠는가?”라며 수학을 배우는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격물치지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완전하게 이룬다는 의미로서, 수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선산학의 서문에는 “내가 소년시절에 산학 책을 얻어서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고 되어 있어 수학 공부의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정선산학’의 편찬자 남순희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파이다.
정선산학과 같은 해인 1900년에 간행된 ‘산술신서(저자 이상설)’는 세로쓰기로 된 정선산학과 달리 수식을 포함해 모두 가로쓰기 형태로 표시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책은 일본인 상야청(上野淸)의 ‘보통교육 근세산술’을 번역한 것이지만, 단순한 번역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덧붙인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상설은 고종 황제의 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다녀온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근대 수학의 아버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북간도로 옮겨가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자신이 직접 쓴 ‘산술신서’로 수학을 가르쳤다.
1901년에 간행된 ‘신정산술(저자 이교승)’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세 권으로 된 시리즈이다. 즉, 1-2권은 1901년에, 3권은 1906년에 간행됐다. 그 이유는 초등과정인 소학교의 심상반 이수과정 3년 동안 각 학년마다 한 권씩 배우게 하는 교과서 용도로 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교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대한제국관원 이력서’에 그가 사범학교 교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책은 본격적인 수학 교사에 의해 저술된 최초의 서양 수학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학은 스스로 깊이 공부해야 하는 학문
신정산술의 서문을 보면 “이 책은 지나친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고 다각도로 분명하게 알려주고 일깨워준다. (중략) 제자들에게 반드시 이 책이 어떻게 솔직하고 자세하게 또한 간단하고 쉽게 되어 있는지를 전수해야 된다”고 적혀 있어 수학교과서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즉, 수학교과서의 대상이 어린 학생들임을 감안하여 학생들 수준에 맞춰 가능한 간단하고 쉬운 교과서를 제작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야 하고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야 하며 조금씩 쌓아서 많은 것이 된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봐서 수학은 스스로 깊이 있게 생각하며 공부해야 하는 학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구를 만드는 기술, 측량의 학문이 도처에서 활약하니 그 도가 크고 빛나니 모두 산학을 싹으로 한다. 국가가 과학과 추산(推算)의 학문을 중시할 때 그것의 최고 경지를 사용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내용도 서문에 적혀 있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융합형 과학기술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수학이 반드시 필요하며, 과학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수학의 최고 경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어 상당히 눈길을 끈다.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필하와(Eva Field)가 편찬해 1902년에 간행된 ‘산술신편’은 당시 조선의 형편과 풍속을 이용한 문제로 생활 수학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 한자 사용을 최소한도로 축소하고 한글 가로쓰기를 통해 일반인들도 알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소학교나 중학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수학을 교육시키려고 배려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1909년에 간행된 ‘근세산술’은 ‘산술신서’의 저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이상설의 동생인 이상익이 저술한 수학교과서로서, 다른 수학책보다 많은 문제 연습을 통한 실질적인 수학 실력 배양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후 총독부에서 발간한 ‘소학산술’과 ‘고등소학 산술서’ 같은 수학책은 식민지교육 정책의 근간이 되는 교과서로서 친일세력과 식민지형 인간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 예로 거리․시간 등의 개념 파악에도 일본 천황의 신궁까지 거리와 소요시간을 다루는 등 민족말살 정책 실시와 더불어 황국신민으로서의 우월감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편집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교육을 위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업적을 남기기 못했던 수학은 8․15 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대 수학의 전개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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