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최고의 수학자, 최악의 변절자

그 가설은 필요하지 않아!”
이는 수학자 라플라스의 말로 수학·과학계에서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학문연구에서 필요하지 않은 가설이 있을 수 있을까? 수학자 라플라스가 말한 필요없는 가설은 다름 아닌 신에 대한 가설이다. 그런데 이 답변이 나오기까지 과정이 흥미롭다.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와 나폴레옹, 스승과 제자로 만나
당대 최고의 수학자 라플라스와 수학자를 사랑한 전쟁의 천재 혁명가 나폴레옹과의 인연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라플라스는 젊은 시절 파리 군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복자 나폴레옹도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천재 수학자 라플라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라플라스는 배신했다.   ⓒ ScienceTimes
나폴레옹은 천재 수학자 라플라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라플라스는 배신했다. ⓒ ScienceTimes
과학에 대해 어느 통치자보다 관심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는 항상 라플라스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훗날 황제가 됐을 때다. 천재적인 수학자였지만 권력에 기웃거리던 라플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자신이 쓴 천체물리학 책 하나를 선사했다.
그러지 않아도 한번 만나길 고대하던 나폴레옹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미 책 내용에 대한 얘기를 들어 알고 있던 나폴레옹이 라플라스를 궁정으로 초청해 물었다.
“선생께서는 우주에 대해 이렇게 방대한 책을 쓰면서도 어떻게 창조주에 대해서는 한마디 없습니까?”
‘신(神) 가설 무용론’이 튀어나온 것이 바로 그 때다. 그는 기회주의적 학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문적 토론에서는 결코 후퇴가 없었다. 상대가 나폴레옹이건 아니건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의 결정론적 세계관대로 그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제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위신 따위는 안중에 없는 라플라스의 태도에 나폴레옹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태도에 당황할 사람은 나폴레옹뿐만은 아니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쾌도난마 식의 답변은 첨단 과학의 시대,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유물론을 지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당혹감을 안긴다.
당시만 해도 무신론은 범죄행위이자 용서받을 수 없는 악마의 이론이었다. 라플라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지만, 자신의 철학을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역시 불세출의 영웅으로 과학자에게만큼은 대단히 관대한 군주였다.
역시 나폴레옹은 여느 통치자와는 달랐다. 나폴레옹은 대단히 재미있어 하며 그 대답을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조제푸르이 라그랑주에게 전해주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라그랑주는 이렇게 외쳤다.
“아, 이건 대단히 멋진 가설이다. 그것 하나만으로 아주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전투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공부에서는 꼴찌를 면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역정을 들여다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1784년, 그의 나이 15세 때 프랑스 왕립 사관학교(Ecole Militaire)에 입학한다.
이 사관학교는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가 파리 시내에 설립한 것으로 오늘날의 사관학교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정사(政事)에는 관심 없고 놀기만을 좋아했던 루이 15세의 취향을 반영하듯이 한마디로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궁전 같은 곳이었다.
매년 입학생이 겨우 50~60 명 정도로 원래 창립 당시에는 가난한 귀족 자제들을 훌륭한 귀족 장교로 키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여기에서는 군사 학문이 전문이 아니라 수학, 문법, 역사, 지리 등이 주된 과목이었다.
또한 군사 훈련보다는 승마, 펜싱, 사교 댄스 등을 배웠다. 루이 15세가 이 사관학교를 창립한 것은 무자비한 전투 장교를 키워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런 싸움꾼들(?) 외국 용병들을 사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루이 15세가 필요했던 것은 국왕에 충성하고, 우아한 교양을 쌓은 귀족 장교였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군사학은 요새 구축법 강의 정도였다. 이 학교에서 나폴레옹은 1년 만에 졸업했다. 나폴레옹의 졸업 성적은 50여명의 졸업생 중 48등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빨리 졸업하여 소위 봉급을 받아야 했다. 남들이 3~4년씩 걸리는 졸업 시험 준비를 1년 만에 마쳐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는 대단한 영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나폴레옹은 그가 사랑했던 수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라플라스를 만나게 된다. 그의 졸업시험을 심사한 교관이 바로 근대확률론의 창시자이자 ‘라플라스의 방정식’으로 유명한 수학자 라플라스였다.
나폴레옹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권력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그는 나폴레옹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는 아랑곳없이 훗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그때 그 코르시카 촌놈을 불합격 시켰으면 유럽의 지도는 많이 달라졌을 거야”
아인슈타인보다 먼저 블랙홀 이론 정립
최고의 수학자이자 최악의 변절자로 낙인 찍혔지만 과학에 대한 그의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예를 들어 블랙홀의 경우가 그렇다.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상식은 아인슈타인이 처음으로 블랙홀 이론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세기 나폴레옹 시대의 예언자 라플라스가 먼저 정립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치밀하고 면밀한 증거를 제시했다는 차원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아인슈타인보다 앞서 설득력 이론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라플라스의 대표적인 업적은 ‘고전확률론’의 정립이다. 관련 연구결과는 1812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확률분석론>에 실려 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인정하는 일부 학자들은 라플라스가 확률론을 완성단계에까지 끌어올린 수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확률은 이렇게 정의했다. “어떤 시행의 결과로 이루어진 집합 S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날 경우, 집합 S에 대한 이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집합 크기의 비율을 ‘확률’이라고 정의한다. 또는 어떤 시행을 n번 반복했을 때 A가 일어날 확률은 PA(Probability of A)로 표현된다.
라플라스는 비단 수학뿐만 고전역학에도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에게는 ‘프랑스의 뉴턴’이라는 명칭이 따라다닌다. 뉴턴이 개척한 고전물리학의 길을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심화시켜 완전한 포장도로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임의의 삼각형 각 변에 그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세개를 덧 그리면, 각 정삼각형의 외접원의 중심을 이어 만들어진 삼각형은 정삼각형이 된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정리다.   ⓒ위키피디아
임의의 삼각형 각 변에 그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세개를 덧 그리면, 각 정삼각형의 외접원의 중심을 이어 만들어진 삼각형은 정삼각형이 된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정리다. ⓒ위키피디아
노르망디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점 이외에는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세가 되던 해 그는 궁핍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파리로 가서 그곳에서 수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 그에게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혈혈단신으로 파리로 간 그는 살아갈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그는 배짱이 두둑했으며 도전의식도 강했다. 여러 가지 역학 원리에 관한 편지를 수학자 장 달랑베르에게 보냈다. 철학자이기도 한 달랑베르는 당시 프랑스의 수학과 고전역학의 최고봉으로 인정 받고 있던 인물이다.
당시 수학자이자 법률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라우스 볼(Rouse Ball)의 기록에 따르면 라플라스가 소개받아 간 달랑베르는 그를 귀찮아 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자주 오는 걸 막기 위해 두꺼운 수학책을 던져주고는 “이걸 다 읽고 이해하고 나서 날 찾아 오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라플라스가 며칠 안 돼서 그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달랑베르는 더 화를 내며 라플라스가 단 며칠 만에 그 책을 읽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거머리 같이 끈질긴 놈”이라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몇 차례 책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고 나자 달랑베르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함께 그가 책을 다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달랑베르는 그를 사관학교의 교수로 추천했다. 나폴레옹과 라플라스의 인연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쿠데타로 집권하자마자 라플라스를 등용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집권한 1799년 바로 그 해에 라플라스를 등용해 내무장관직을 맡게 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능력은 최악이었다. 6주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적으로 타협할 모르는 그의 외고집이 고스란히 나타나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심지어 부하 직원들에게 미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행정관으로서는 완전히 낙제생이라고 혹평하면서도 나폴레옹은 그를 상원의원에 임명하고 백작의 작위도 수여했다. 나폴레옹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라플라스는 나폴레옹 집권 기간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그를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로 만들어 준 ‘천체 역학이론’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에 충성을 맹세해 후작의 지위를 받는 등 부와 명예를 계속 누렸다. 프랑스 혁명기 수학자 가운데 가장 약삭빠르게 처신한 라플라스는 그 덕에 화려하면서도 평온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의 변절은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불명예로 남았다.
나폴레옹, 독일 수학자 가우스 마을은 공격하지 않아
원래 통치자는 측근으로 신하를 선택할 때 실력보다 충성심을 더 따진다. 변절과 배신을 가장 증오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 가지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는 나폴레옹은 달랐다. 나폴레옹은 수학자를 비롯한 과학자들을 우대했다.
충성심 여부에 관계 없이 능력 있는 과학자를 좋아했다. 독일을 침공할 때도 나폴레옹은 당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칭송 받고 있던 가우스(Gauss, 1777-1855)가 사는 마을은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전통이 세워진 것은 아닐까? 세계 1, 2차 대전 기간 동안 서로 앙숙이었던 독일과 영국이 비밀리에 맺은 계약이 있다. 서로 싸우고 폭격은 하되,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독일의 명문 뮌헨과 괴팅겐 대학은 건드리지 않기로 말이다. 사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이 명문대학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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