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한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과학과 과학자를 사랑하고 관심을 두는 이유는 대충 세가지로 축약된다. 학문에 대한 고매한 인격이나
품성의 발로가 아니다. 대부분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통치자는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
우선 수리공사를 들 수 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치산치수(治山治水)는 농경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댐을 쌓아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는 일이야 말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에 따라 천문학과 기상학도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문명의 밑거름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높은 산들과 동아프리카의 큰 호수에서 발원하는 나일 강에는 봄과 여름에 정기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강의 수위가 최고에 달해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홍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큰 피해를 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홍수와는 달리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따라서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생태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는 전쟁무기의 개발이다. 끊임 없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첨단 무기의 개발은 다른 나라를 제압하고 영토를 뺏는 정복자에게는 매력이 당기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또 호전적인 정복야욕이 아니더라도 군비경쟁에서 우월한 고지를 점하는 국가안보에 중요한 기틀이 되기 때문이다.
무기라는 공포스러운 것을 참을성 있게 찬찬히 뜯어보면 첨단과학의 집약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국에 없는 무적의 신무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과학기술을 고도로 첨예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러한 기술은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적 이용이다. 원자폭탄제조 기술이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자로로 개발된 경우가 그렇다.
마지막으로는 정복한 국가로부터 고대유물을 약탈하고 발굴해 본국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여기에서 과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리품은 승자에게 있다”는 말이 있다. 전리품 가운데 중요한 것이 피정복지의 고대 유물이다. 역사에서 흔히 쓰이는 고대 통치자들의 ‘동방원정’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시작됐다.
세계적인 유물, 정복자들의 전리품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를 비롯해 유럽의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유물들 가운데 90%이상이 피정복 국가로부터 탈취한 것들이다. 식민지 지배의 유물들은 문화사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성하고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쿠데타로 집권을 하기 바로 1년 전인 1789년 5월 나폴레옹은 400척의 배에 3만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 남부의 항구 툴롱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그 가운데에는 나폴레옹이 훗날 원수(元帥)로 삼게 되는 장교 다섯 명도 포함돼 있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이 이집트 원정에 167명의 과학자와 건축 기술자로 구성된 학술조사단을 동행시켰다. 그가 사랑했던 수학자이자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은 충성스러운 신하 몽주가 학술조사단을 이끈 총책이었다.
박식한 석학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이집트에서 약탈하고 발굴한 수많은 보물들을 본국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냈다. 이집트에서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원정의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그들은 이집트의 지형과 산물을 조사하는 외에도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발굴하는데도 앞장섰다. 이집트 조사단의 지식의 정수는 22권으로 된 ‘이집트 저널’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는 근동(近東 서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열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로제타석, 영국에 빼앗겨
고대 이집트와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로제타석(Rosetta Stone)의 발견은 조사단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다. 로제타석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다음해인 1799년 7월 공병대의 한 장교가 나일강 어귀에 있는 로제타라는 곳에서 발견했다.
이집트 역사상 가잔 강성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적을 찬양한 비석이다. 그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이 비석 발굴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이 비석의 해석에 착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본국으로 이송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 폴레옹의 원정은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집트의 지배계층과의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나일강 전투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또한 내륙전투에서도 전염병(학자들은 페스트로 추정한다) 때문에 원정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속에서 로제타석에 대한 비밀이 새나갔다. 그리고 이 비석이 현재 이집트 어느 곳에 숨겨져 있다는 정보도 영국군이 입수했다.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이긴 영국군이 로제타석을 프랑스에 넘겨줄 리 만무하다. 결국 양국의 평화조약에서 로제타석은 결국 영국이 차지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문명비판론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현대 중동연구에서 가장 인정 받고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이집트 저널’의 탄생이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제국주의에 근거한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하였다.
푸리에, 이집트 원정으로 출세가도 달려
나폴레옹이 이끈 이집트 원정대의 학술조사단에는 당시 최고의 수학자이자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푸리에(Jean Joseph Fourier 1768~1830)에도 포함돼 있었다. 아마 학술조사단을 이끈 몽주가 발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푸리에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프랑스 중부 오제르의 한 가난한 양복가게 아들로 태어나 8세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성직자의 양자로 길러졌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신분이 낮아 그가 원했던 사관학교에 입학 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권력에 대한 열망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1789의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대변혁은 그에게는 낮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도원을 나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로 인해 여러 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1794년 파리에 있는 에콜 노르말(Ecole Normale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몽주와 라플라스를 만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집트 원정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집트 원정에서 영국에 패한 나폴레옹이 1년 만에 프랑스로 환국한 이후에도 11명의 학자들과 함께 카이로에 남아 고대 수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면서 프랑스가 세운 이집트연구소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집트 저널, 성공리에 완성
2년 후에 그가 프랑스로 돌아오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그의 행정 능력을 인정해 프랑스 동부 끝자락에 있는 이제르(Isere)주의 주지사로 임명한다. 그는 여기에서도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여 도로건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푸리에의 과학적인 능력과 믿음이 더욱 확실해진 나폴레옹은 다시 그를 다시 파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가 세운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선사했다. 고아 신분에서 학자로서는 최고의 신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각종 수학과 물리학 이론을 발표해 과학자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푸리에게 빠져든 것은 이집트원정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저널’ 편찬에 그가 보여준 탁월한 능력이었다. 그는 남작에서 백작의 작위를 받는 등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열역학 이론’과 ‘푸리에 방정식’으로 수학과 물리학에 있어서 후세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이 모두 나폴레옹의 배려와 사랑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학자였다.
두 번이나 배신했지만 나폴레옹은 받아들여
1815년 영국을 비롯해 프로이센(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실각하자 푸리에는 잽싸게 왕정으로 복고한 루이 18세에게 달려가 충성을 맹세해 명예와 권력을 계속 유지한다.
이듬해인 3월 귀양지인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된다. 그러자 다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과학자에 관대했던 나폴레옹은 그를 용서하고 등용해 요직을 맡긴다.
그러나 변절자가 그리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의 최후의 일전인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백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푸리에는 다시 루이 18세에 선처를 호소한다. 그러나 결국 루이 18세의 분노를 사 권력의 대열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다 생을 마감한다.
나폴레옹, 수학강국 프랑스의 기틀 마련
레옹의 인재양성 정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폴레옹은 어느 누구보다도 정복야욕과 전쟁에 애착을 갖고 있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학구열도 불같이 뜨거웠다. 전쟁 중에도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실은 이동도서관을 끌고 다녔다.
또한 전투와는 전혀 관계 없는 학자들을 대동해 타국의 고도화된 문명을 연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진문명을 본국으로 수입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유럽전쟁은 분명 정복자의 야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방원정은 영토정복이라기 보다 문명정복이었다.
푸리에의 기술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수학, 특히 군사적으로 용이한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고 상당한 소질도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수학자 마스케로니(Lorezo Mascheroni 1750~1800)로부터 헌정 받은 ‘마스케로니’ 정리를 프랑스 수학계에 전파한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는 과학강국이다. 기초과학도 강하다. 특히 전통적으로 수학이 강하고 이 분야에서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된 그 이면에는 수학과 수학자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은 수학자와 과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이나 인류학이라는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지식인을 사랑했다. 오늘날 나폴레옹을 역사상 무자비한 정복자, 또는 약탈자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통치자는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
우선 수리공사를 들 수 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치산치수(治山治水)는 농경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댐을 쌓아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는 일이야 말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에 따라 천문학과 기상학도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문명의 밑거름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높은 산들과 동아프리카의 큰 호수에서 발원하는 나일 강에는 봄과 여름에 정기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강의 수위가 최고에 달해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홍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큰 피해를 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홍수와는 달리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따라서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생태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는 전쟁무기의 개발이다. 끊임 없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첨단 무기의 개발은 다른 나라를 제압하고 영토를 뺏는 정복자에게는 매력이 당기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또 호전적인 정복야욕이 아니더라도 군비경쟁에서 우월한 고지를 점하는 국가안보에 중요한 기틀이 되기 때문이다.
무기라는 공포스러운 것을 참을성 있게 찬찬히 뜯어보면 첨단과학의 집약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국에 없는 무적의 신무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과학기술을 고도로 첨예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러한 기술은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적 이용이다. 원자폭탄제조 기술이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자로로 개발된 경우가 그렇다.
마지막으로는 정복한 국가로부터 고대유물을 약탈하고 발굴해 본국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여기에서 과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리품은 승자에게 있다”는 말이 있다. 전리품 가운데 중요한 것이 피정복지의 고대 유물이다. 역사에서 흔히 쓰이는 고대 통치자들의 ‘동방원정’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시작됐다.
세계적인 유물, 정복자들의 전리품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를 비롯해 유럽의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유물들 가운데 90%이상이 피정복 국가로부터 탈취한 것들이다. 식민지 지배의 유물들은 문화사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성하고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쿠데타로 집권을 하기 바로 1년 전인 1789년 5월 나폴레옹은 400척의 배에 3만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 남부의 항구 툴롱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그 가운데에는 나폴레옹이 훗날 원수(元帥)로 삼게 되는 장교 다섯 명도 포함돼 있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이 이집트 원정에 167명의 과학자와 건축 기술자로 구성된 학술조사단을 동행시켰다. 그가 사랑했던 수학자이자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은 충성스러운 신하 몽주가 학술조사단을 이끈 총책이었다.
박식한 석학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이집트에서 약탈하고 발굴한 수많은 보물들을 본국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냈다. 이집트에서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원정의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그들은 이집트의 지형과 산물을 조사하는 외에도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발굴하는데도 앞장섰다. 이집트 조사단의 지식의 정수는 22권으로 된 ‘이집트 저널’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는 근동(近東 서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열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로제타석, 영국에 빼앗겨
고대 이집트와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로제타석(Rosetta Stone)의 발견은 조사단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다. 로제타석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다음해인 1799년 7월 공병대의 한 장교가 나일강 어귀에 있는 로제타라는 곳에서 발견했다.
이집트 역사상 가잔 강성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적을 찬양한 비석이다. 그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이 비석 발굴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이 비석의 해석에 착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본국으로 이송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 폴레옹의 원정은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집트의 지배계층과의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나일강 전투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또한 내륙전투에서도 전염병(학자들은 페스트로 추정한다) 때문에 원정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속에서 로제타석에 대한 비밀이 새나갔다. 그리고 이 비석이 현재 이집트 어느 곳에 숨겨져 있다는 정보도 영국군이 입수했다.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이긴 영국군이 로제타석을 프랑스에 넘겨줄 리 만무하다. 결국 양국의 평화조약에서 로제타석은 결국 영국이 차지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문명비판론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현대 중동연구에서 가장 인정 받고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이집트 저널’의 탄생이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제국주의에 근거한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하였다.
푸리에, 이집트 원정으로 출세가도 달려
나폴레옹이 이끈 이집트 원정대의 학술조사단에는 당시 최고의 수학자이자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푸리에(Jean Joseph Fourier 1768~1830)에도 포함돼 있었다. 아마 학술조사단을 이끈 몽주가 발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푸리에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프랑스 중부 오제르의 한 가난한 양복가게 아들로 태어나 8세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성직자의 양자로 길러졌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신분이 낮아 그가 원했던 사관학교에 입학 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권력에 대한 열망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1789의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대변혁은 그에게는 낮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도원을 나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로 인해 여러 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1794년 파리에 있는 에콜 노르말(Ecole Normale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몽주와 라플라스를 만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집트 원정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집트 원정에서 영국에 패한 나폴레옹이 1년 만에 프랑스로 환국한 이후에도 11명의 학자들과 함께 카이로에 남아 고대 수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면서 프랑스가 세운 이집트연구소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집트 저널, 성공리에 완성
2년 후에 그가 프랑스로 돌아오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그의 행정 능력을 인정해 프랑스 동부 끝자락에 있는 이제르(Isere)주의 주지사로 임명한다. 그는 여기에서도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여 도로건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푸리에의 과학적인 능력과 믿음이 더욱 확실해진 나폴레옹은 다시 그를 다시 파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가 세운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선사했다. 고아 신분에서 학자로서는 최고의 신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각종 수학과 물리학 이론을 발표해 과학자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푸리에게 빠져든 것은 이집트원정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저널’ 편찬에 그가 보여준 탁월한 능력이었다. 그는 남작에서 백작의 작위를 받는 등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열역학 이론’과 ‘푸리에 방정식’으로 수학과 물리학에 있어서 후세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이 모두 나폴레옹의 배려와 사랑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학자였다.
두 번이나 배신했지만 나폴레옹은 받아들여
1815년 영국을 비롯해 프로이센(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실각하자 푸리에는 잽싸게 왕정으로 복고한 루이 18세에게 달려가 충성을 맹세해 명예와 권력을 계속 유지한다.
이듬해인 3월 귀양지인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된다. 그러자 다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과학자에 관대했던 나폴레옹은 그를 용서하고 등용해 요직을 맡긴다.
그러나 변절자가 그리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의 최후의 일전인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백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푸리에는 다시 루이 18세에 선처를 호소한다. 그러나 결국 루이 18세의 분노를 사 권력의 대열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다 생을 마감한다.
나폴레옹, 수학강국 프랑스의 기틀 마련
레옹의 인재양성 정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폴레옹은 어느 누구보다도 정복야욕과 전쟁에 애착을 갖고 있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학구열도 불같이 뜨거웠다. 전쟁 중에도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실은 이동도서관을 끌고 다녔다.
또한 전투와는 전혀 관계 없는 학자들을 대동해 타국의 고도화된 문명을 연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진문명을 본국으로 수입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유럽전쟁은 분명 정복자의 야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방원정은 영토정복이라기 보다 문명정복이었다.
푸리에의 기술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수학, 특히 군사적으로 용이한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고 상당한 소질도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수학자 마스케로니(Lorezo Mascheroni 1750~1800)로부터 헌정 받은 ‘마스케로니’ 정리를 프랑스 수학계에 전파한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는 과학강국이다. 기초과학도 강하다. 특히 전통적으로 수학이 강하고 이 분야에서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된 그 이면에는 수학과 수학자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은 수학자와 과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이나 인류학이라는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지식인을 사랑했다. 오늘날 나폴레옹을 역사상 무자비한 정복자, 또는 약탈자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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