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우주엔 ‘변화’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존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의 다른 무언가를 거쳐야 한다. 만약 ‘그 무언가’가 역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존재에서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지 변신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러니까 ‘무(無)’가 존재해야 한다. 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들은 변할 수도, 생산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영원하며 하나라는 말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다. 어렵다. 오죽하면 플라톤도 어려워했을까.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더 따라가서 존재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라고 가설해보자. 하나와 여러 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는 같은 것이고, 여러 개는 다른 것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들은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존재가 하나라면 그것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제우스신만을 위한 법칙, 불을 위한 법칙, 나를 위한 법칙, 내 생각만을 위한 법칙같이 다양하고 서로 독립적인 법칙들이 우주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19세기 과학은 자연의 비밀을 캐는 학문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남부 이탈리아는 문화의 변두리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테네, 그리고 사치스러웠던 이오니아인들이 보기엔 얼마나 촌스러운 곳이었을까? 하지만 그 시골 바닷가에 앉아 매일 밤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의 작은 생각을 피워 올렸다: 존재는 하나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만물 법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인간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단 하나의 만물 법칙으로 설명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밤하늘의 별들과 내가 바다에 던진 작은 돌이 같은 법칙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세상을 우리 눈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빌려보자: “Phusis kruptesthai philei”. 자연은 숨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렇다. 자연은 마치 베일을 쓴 여신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만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자연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인간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센강 변엔 오르세이 미술관이 있다. 기차역으로 쓰이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신시킨 -파르메니데스가 그다지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은- 건물이다. 이 미술관 한 곳엔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가 1899년 완성한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이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줍은 자연은 영원히 숨으려 하지만, 과학은 그녀의 베일을 결국 벗겨버린다는 게 주제다.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벌거벗겨진 자연의 가슴과 음부를 관찰하고 손으로 쥐어짜고 냄새를 맡아본다.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성폭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어떻게 자연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관찰과 수학을 통해서다. 바닷가에서 돌을 던진다고 상상해 보자. 어떻게 던지면 가장 멀리 날아갈까? 책상에 앉아 멋진 이론을 만들고, 상상만 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주장했듯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된 관찰, 고로 ‘실험’을 해야 한다. 각도를 너무 낮게 잡으면 수직으로 빨리 날아오르지만 금방 땅에 떨어진다. 거꾸로 각도를 높게 잡으면 공중엔 오래 머물겠지만, 멀리 날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멀리’ ‘오래’ 같은 단어들은 주관적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의 결과를 숫자를 통해 표현한다면 어떨까?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기록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가장 자세한 행성 관측 자료를 완성한다. 바로 후원자였던 황제의 이름을 딴 그 유명한 ‘루돌프 표’다. 표에 적힌 수천, 수만 개의 숫자들. 우주구조의 비밀이 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게 분명하다! 우주의 비밀이 숫자들 사이에 있다면, 그 관계를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자연의 법칙은 숫자들을 서로 묶는 수학적 원리를 통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흙·공기·물을 존재의 4대 원소라고 생각했다. 만물의 모든 존재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4개일까? 플라톤은 후기 작품 티마이오스에서 4대 원소, 그리고 그 원소들을 품은 우주 전체를 5종의 정다면체와 연관시켰다. 정다면체란 무엇인가? 정4각형, 정5각형, 정6각형 같은 정n각형을 결합하면 입체도형을 만들 수 있다. 그 많은 정n각형 입체도형 중 단 한 가지 정다각형으로 둘러싸인 입체도형은 몇 가지나 있을까? 오늘날 플라톤의 입체라 불리는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다섯 개뿐이며 각각 불, 흙, 공기, 우주, 물에 대응한다.
케플러는 생각했다.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 등 당시 알려진 6개 행성들의 원형궤도를, 서로 포개져 겹을 형성한 플라톤의 5개 입체들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루돌프 표에 적혀있는 숫자들은 플라톤의 입체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지친 케플러는 마지막 시도를 한다. 만약… 만약… 태양계 행성들이 완벽한 원형을 따르지 않는다면? 만약 행성들이 원이 아닌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케플러의 직감은 맞았고, 그의 행성 운동 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이 된다. 결국 우주의 법칙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은 관찰할 수 있고, 측정된 자연은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들 사이엔 절대적 관계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관계들을 통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뉴턴,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 파르메니데스의 2500년 전 꿈을 우리는 이렇게 관찰과 수학을 통해 실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수학일까? 수학이란 무엇일까?
한국어, 영어, C++(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산스크리트같이 수학도 사람이 만들어낸 언어에 불과할까? 소련 수학자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Kolmogorov)는 “숫자는 인간 뇌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독일의 레오폴드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는 “1, 2, 3,… 같은 자연수들은 신이 만들었지만 나머지 모든 수학은 인간의 작품”이라 말했다.
하지만 두개골 속 1.5㎏짜리 고기 덩어리인 ‘뇌’가 만들었다는 수학으로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기원과 양자 사이의 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수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그렇기에 “자연을 설명하는 수학의 ‘지나칠 정도의 효율성’이 놀랍다”고 한다. 손으로 던진 돌은 지구 중력의 영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움직인다. 두 점(点)질량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왜 우주의 법칙은 숫자들 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의 법칙을 인간은 단순히 수학이라는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숫자들은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실질적 실체이며, 그들의 관계가 결국 우주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주장도 해볼 수 있겠다. 우주 그 자체가 수학이라고.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실체들은 물리학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라는 함수를 계산해내는 컴퓨터의 부분들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해’ 그 자체가 우주라고 불리는 컴퓨터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 중인 유일한 존재함수의 계산과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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