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혁명 속에서 등장한 수학자들

혁명이란 한 국가의 대변혁이다. 과학기술의 흐름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혹시 가치와 이념의 판단기준이 결코 될 수 없는 순수기초과학도 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예외였다.
프랑스 혁명은 수학을 변화시켰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보면 사회적 변화가 수학에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떤 변화를 야기시키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혁명은 모든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다.
“위대한 군 지도자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 동안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테어 혼(Alistair Horne)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다. 오늘날까지 영웅의 아이콘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매우 다면적인 사람이다. 정복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각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가 타고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노새로 판명됐다. 그는 역대 어떤 통치자보다 과학과 과학자를 좋아했다. 특히 수학자들을 사랑했다. ⓒ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가 타고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노새로 판명됐다. 그는 역대 어떤 통치자보다 과학과 과학자를 좋아했다. 특히 수학자들을 사랑했다. ⓒ 위키피디아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 젊어서부터 수학에 관심 많아
그러나 여기에서 빠진 것이 있다. 그는 세계 역사상 어떤 최고 통치자들보다도 과학과 과학자를 사랑한 인물이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특히 수학자들을 좋아했다. 유럽의 전쟁은 원래 해전이 아니라 내륙전쟁이었다.
보병보다 포병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정확한 위치에 포탄이 떨어지도록 포(砲)를 운영하는 작업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러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은 수학자들을 좋아한 걸까?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왕들과 귀족들 사이에선 수학자들과 사교 모임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수학자를 데리고 있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능 좋은 무기를 개발하고, 최적의 방법으로 군사전략을 짤 수 있는 사람이 수학자라고 여겼다.
수학자들과 친분을 두텁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군사 요직에 앉혀 군사력을 키웠다. 나폴레옹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출신의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 라플라스, 조제프 푸리에, 마스케로니와 친하게 지냈고, 그들과 만나 수학 문제 내는 것을 취미생활로 삼았다.
나폴레옹의 정리, 그리고 에콜 폴리테크니크도 세워
이 과정에서 본인의 이름을 딴 수학정리도 탄생했다. ‘나폴레옹의 정리’가 그렇다. 임의의 삼각형 각 변에 그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세 개를 덧그리면, 각 정삼각형의 외접원의 중심을 이어 만들어진 삼각형은 정삼각형이 된다는 정리다.
나폴레옹은 수학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의 모든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수학은 국력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우수한 수학자 양성을 위해 수학종합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를 세웠다.
1794년에 세워진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 높은 대표적인 공학계열 가운데 하나이다. 프랑스 사회에서 흔히 ‘X’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폴레옹에 의해 설립된 군사학교였으므로, X는 두 대포가 크로스 된 형태를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나폴레옹이 국가의 고위 기술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프랑스 국방부의 감독하에 운영되면서 입학과 동시에 공무원 신분이 되어 졸업 후에는 정부의 고위 기술관료로 임용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 학부 과정에서는 공학 교육 이전에 일정 기간의 군사 교육 기간을 거쳐야 한다.
파리공과대학으로 불리는 이 대학은 오늘날 유럽 대학순위에서 10위 안에 들 정도로 권위 있는 유명한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프랑스에서 수학을 가장 잘하는 학교로 프랑스 수학의 산실이다. 로랑 슈와르츠, 장 크리스토프 요코즈 등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나폴레옹이 사랑한 몽주는 화법기하학의 창시자
나폴레옹이 사랑한 과학자들은 많다. 그 가운 그가 짝사랑한 세 명의 수학자가 있다. 화법기하학을 창안한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도 그 중 한 명이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운명까지도 함께한 그는 진실로 충성스러운 나폴레옹의 신하이자 동반자였다.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당대 유명한 수학자 몽주는 나폴레옹이 가장 아끼는 수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위키피디아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당대 유명한 수학자 몽주는 나폴레옹이 가장 아끼는 수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위키피디아
1746년 본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에서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몽주는 어려서부터 기하학과 기계조작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소화(消火) 펌프 ·측량기 등을 만들었으며 16세 때 리옹에서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신분이 낮아 입학할 수 없었는데도 재능을 인정받아 육군 공병학교를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뜨내기 장사꾼이라는 이유로 장교 프로그램에 참여할 자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학 중에 축성(築城)에 관한 문제를 종래의 산술적인 계산으로 풀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안출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풀었다. 이것이 오늘날 ‘화법기하학(Descriptive Geometry)’의 기원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로 분류돼 15년 동안이나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곧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1780년 파리대학에서 수력학(水力學)을 강의하였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군수품 생산기술과 조직에 진력하였으며,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로서 1792년 혁명정부의 해군장관이 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나폴레옹을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1796년의 일이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거머쥐기 3년 전이었다.
과학에 혜안을 갖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이미 그의 재능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대혁명으로 여파로 분열되고 불안한 사회에 대해 우려하고 식상했던 몽주는 나폴레옹에게 맹성을 약속했다.
두 사람 간에 친구라는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동반자 관계로 진전했다. 나폴레옹의 신임과 우대를 받은 그는 이탈리아, 이집트 등의 원정에 참가하였다. 물론 전쟁도 전쟁이었지만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 지역에서 고대 유물을 발견하고 영국으로 수송시키려는 나폴레옹의 야심도 크게 작용했다.
나폴레옹과 영욕(榮辱)을 같이한 지조 있는 수학자  
사실 오늘날 프랑스가 자랑하는 루브르 박물관이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자리잡기 까지는 나폴레옹의 헌신적인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실패였지만, 학문과 과학 면에서는 성공이었다.
“우리는 동방으로 가야 한다. 모든 위대한 영광은 그곳에 머무른다” 나폴레옹은 제2의 알렉산더 대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근대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 고대 동방의 지혜를 배워 동양에 제국을 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 그림과 동상을 선택하도록 했다. 이 예술품들의 상당수가 루브르에 보내졌다. 그는 1798년부터 1801년까지 이집트 원정 당시 나폴레옹을 수행했다. 1798년에는 카이로에 프랑스 학술원 형태를 본뜬 학술기관인 이집트 학술원의 설립을 도왔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부르봉 왕가는 나폴레옹 지지자라는 이유로 몽주에게서 모든 명예를 박탈하고 1816년에 재구성된 학술원 명부에서 제외시켰다. 물론 처형당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정복자 나폴레옹의 운명과 몰락을 같이했다.
새 왕정은 몽주에게 많은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황제 나폴레옹의 중추적인 고문 역할을 수행하면서 러시아 원정 및 워털루 전쟁 패전으로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과 지조를 잃지 않았다.
나폴레옹만이 아니다. 어떤 최고의 통치자가 몽주 같은 과학자를 싫어하겠는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 많은 배신자들을 목격해 왔다. 영웅인가, 반란의 괴수인가? 나폴레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심판 중에 있다. 몽주는 권력과 위협에 쉽게 굴복하는 그런 지식인이 결코 아니었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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