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손손 인재 양성하는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엿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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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가, 게이츠가, 퀴리가, 톨스토이가 등과 같은 세계 명문가들은 지금까지 몇 대에 걸쳐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어떤 힘이 자손 대대로 인재들을 양산하는 것일까? 그 원천은 바로 자녀교육에 있다. 전통적인 세계 명문가들은 남다른 자녀교육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비법을 통해 자녀교육의 해법을 찾아보자. |
100년 전에 노벨상을 타게 한 평등 부부의 정신 노벨상의 명문가_퀴리家 ●아버지와 공부하며, 아버지를 닮아가다퀴리가는 2대에 걸쳐 부부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겨 학문의 명가를 이루고 있다. 퀴리 부인이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아 노벨상 2관왕에 올랐고, 그녀의 딸 이렌느는 남편 졸리오와 함께 1935년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퀴리 부인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는 아내를 만나기 전 형과 공동 연구를 진행했고, 결혼 후에는 과학자인 아내와 연구를 이어갔다. 피에르 퀴리가 형, 아내와 함께 공동 연구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 외젠 퀴리의 영향이 컸다. 피에르 퀴리 집안은 아버지 외젠 퀴리와 할아버지 모두 의사였다. 피에르의 아버지는 의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도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를 했고, 아들이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키우면서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독려했다. 피에르는 어린 시절 지적 발달이 늦었다. 학교 적응이 어려울 거라 판단한 피에르의 아버지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공부했고, 형 역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이 두 형제는 아버지 아래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피에르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아버지가 실험을 위해 식물과 동물을 가져오면 그것들을 보면서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다. 또한 아버지의 독서 습관에 영향을 받아 문학과 역사에 대한 서적을 많이 읽으며 지식의 폭을 넓혔다. ●●부부가 몸소 실천한 남녀평등 교육 아내와 동등한 자격으로 연구하고 명성까지 함께 나눈 퀴리 부부는 100년이나 앞섰던 평등 부부였다. 그래서인지 퀴리가는 여성들의 학문적 열정과 성공이 유독 두드러진다. 퀴리 부인을 시작으로 연달아 4대에 걸쳐 과학자를 배출했다. 퀴리 부인과 그의 딸 이렌느는 노벨상을 받았고, 이렌느의 딸 엘렌도 물리학자가 되었다. 또 엘렌의 두 아들도 물리학자로 이름을 알리면서 4대째 과학자를 배출하는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당시 퀴리가 여성들의 진출은 대단한 이슈였을 것이다. 게다가 평등부부로 나란히 연구에 매진한 퀴리 부부는 아이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이렌느 부부 역시 공동연구를 통한 부부 노벨상을 받는 결실을 이루었다. 이렌느의 남편 졸리오는 퀴리가의 학문적 가풍에 매료되어 졸리오 대신 졸리오 퀴리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 퀴리가의 자녀교육 10훈 아이를 훌륭한 과학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에게 1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2 평등부부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또한 훌륭한 자녀교육이다. 3 자연 속에서 과학에 대한 탐구심을 갖도록 가르친다. 4 아버지가 가정교사이자 멘토 역할을 한다. 5 할아버지가 손녀를 가르치며 격대교육을 한다. 6 맞벌이를 하더라도 아이와 신뢰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7 어머니가 주도해 품앗이 교육을 한다. 8 스스로 자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다. 9 과학자를 대물림하도록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10 학문에서도 궁합이 잘 맞는 배우자를 찾는다. 진짜 부자 아빠는 자녀에게 큰돈을 주지 않는다. 시애틀의 은행 명문가_게이츠家 ●폭넓은 경험을 제공하다. 빌 게이츠는 공상과학소설에 매료되어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고, 일곱 살에는 백과사전을 탐독했으며, 위인전을 닥치는 대로 읽기도 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늘 일등을 하려 하며 남에게 지기 싫어해 다섯 페이지의 리포트를 서른 페이지가 넘는 논문으로 작성하곤 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규칙을 잘 따르지 못했다. 어머니는 외골수인 그를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보내거나 테니스와 수상스키를 하게 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요일에 따라 다른 색깔의 옷을 입혔고, 식사도 규칙적으로 하도록 가르쳤는데, 빌이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실행해 시간 낭비를 막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이러한 훈련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으로 매일 한 시간 이상, 주말에는 두세 시간 이상 책 읽는 습관을 실천하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빌이었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었다. 부모 역시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빌은 다시 돌아와 학교를 졸업했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외할머니와의 놀이 교육 빌은 어려서 외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봉사활동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그는 할머니가 손수 구운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게임과 카드놀이를 통해 창의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경쟁심이 강해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했고, 최고가 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외할머니는 카드놀이를 통해 이러한 개성과 재능을 잘 살려주었다. 또한 할머니는 늘 빌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독서광이 되기까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수학과 과학을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고전 등을 할머니와 함께 읽었으며, 이 덕분에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열리는 도서경연대회에서는 늘 일등을 차지했다. ●●●‘돈을 어떻게 쓰는가’도 중요하다 빌 게이츠는 대은행가인 미국 서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워싱턴 주립대학 법대를 나온 변호사로 시애틀에서 법률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주변호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워싱턴대학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자선사업가로 시애틀의 사교계에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자선단체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경영보다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 더욱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이미 3대에 걸쳐 돈에 대한 모든 것을 소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증조할아버지는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고 할아버지도 그랬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 역시 돈뿐만 아니라 변호사로서 사회적 명예도 얻었다. 빌 게이츠도 그들의 뒤를 이어 자신의 선조들이 못다 한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해 있는 그에게 “지금이 바로 자선활동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말하며 그의 자선활동을 독려했다. 빌 게이츠의 왕성한 자선활동은 단지 돈이 많아서가 아닌, 부모가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다. ◈ 게이츠가의 자녀교육 10훈 자녀를 제2, 제3의 빌 게이츠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에게 1 큰돈을 물려주면 결코 창의적인 아이가 되지 못한다. 2 부모가 나서서 아이의 인맥 네크워크를 넓혀준다. 3 단점을 보완해주고 뜻이 통하는 친구를 사귄다. 4 어릴 때에는 공상과학소설을 많이 읽는다. 5 어머니의 선물이 때로는 아이의 인생을 바꾼다. 6 신문을 보며 세상 보는 안목과 관심 분야를 넓힌다. 7 부잣집 아이라고 결코 곱게 키우지 마라. 8 기회가 왔을 때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한다. 9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자라서 든든한 사업 밑천이 된다. 10 부모가 자선에 앞장서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본받는다.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을 친구로 만들어라 정치명문가_케네디家 ●최고가 되어야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먼저 미국으로 이주해 부와 명예를 쌓은 보스턴의 영국계 가문들로부터 항상 무시를 당했다. 아일랜드계 케네디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최고가 되어야 했다. 존 F. 케네디의 아버지 패트릭은 아일랜드계로서는 최초로 하버드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영국계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때 맺은 인맥은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케네디 가문은 최고가 되기 위해 하버드대학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케네디 아버지와 네 명의 아들이 모두 이곳을 졸업했고, 이때부터 하버드대학은 케네디가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하버드대학에는 케네디의 이름이 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이 있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하건 반드시 이기라고 했다. 그들에게 2등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케네디가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일등주의가 아닌 최선을 다한다는 정신에 있었다. ●●CEO처럼 아이들을 관리하다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는 자녀들에게 항상 “서툴러도 반복해서 최선을 다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고, 패배한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9명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개발하는 데 많은 역점을 두었다. 로즈는 컴퓨터처럼 각 아이들의 카드를 만들어 주사 맞기, 충치 치료, 신발 크기, 성적 등 아이들에 관한 자료를 빠짐없이 적어 놓았다. 토요일 저녁에는 반드시 몸무게를 달았고, 석 달마다 치과에 데려가기도 했으며, 생년월일과 건강, 기타 성장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한 육아일기를 빈틈없이 작성했다. 아이들에게 규칙을 정해놓고 이를 어겼을 때는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고, 특히 장남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남이 잘하면 동생들은 자연스럽게 따라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독서교육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아예 독서 리스트를 따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유익한 책들을 읽게 했다.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들 교육 케네디의 아버지는 대학 졸업 3년 만에 은행장이 되었고, 30대에는 이미 재벌이 되었지만, 돈벌이에만 바쁜 아버지는 아니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끔찍하게 챙기고 가능하면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으며 바쁜 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아내와 9명의 자녀들은 한 사람씩 순서대로 통화를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전화로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편지로 썼다. 공부는 뒷전인 케네디에게 아버지는 화를 억누르며 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버지는 출장 후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 시간을 통해 자신이 만난 유명 인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이들은 그런 시간을 통해 어려서부터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식사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나누게 함으로써 그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파악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아침식사 식탁에서 ‘뉴욕타임스’ 기사를 대화의 소재로 삼았고, 뉴욕타임스’를 읽지 않으면 토론에 낄 수 없었다.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시간을 엄수하게 했는데, 이러한 훈련은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케네디가의 교육을 통해 케네디는 28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43세에는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의원과 대통령 예비후보였으며,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의원을 맡고 있다. 이 밖에도 케네디 가문의 자녀들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에드워드의 아들 패티릭이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 케네디가의 자녀교육 10훈 가난을 이겨내고 대대로 정치 명문가를 꿈꾸는 부모들에게 1 아이의 육아일기와 독서록을 만들며 철저하게 점검한다. 2 시간 약속을 지키는 습관을 길러준다. 3 아버지는 사업상 일어난 일들을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준다. 4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5 일등을 하면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세상의 법칙을 가르친다. 6 어려움에 처할 때는 아이의 편에 서서 해결해준다. 7 명문대학에 진학해 최고의 인맥 네트워크를 쌓게 한다. 8 처음에는 서툴러도 열심히 반복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9 목표는 크게 정하되 서둘지 말고 단계적으로 실현하도록 지도한다. 10 부모 형제끼리 화합하고 서로 자기 일처럼 챙기게 한다. 창작의 산실이 된 가문의 전설과 60년간의 일기 러시아의 600년 명문가_톨스토이家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힘의 원천 지금부터 300년 전 톨스토이의 고조부인 표트르 안드레비치 톨스토이는 군사령관과 외교관을 역임했으며, ‘이탈리아 여행기’를 쓰기도 했다. 청소년기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것은 가문의 내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가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톨스토이의 집안에는 선조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면 전장으로 달려갔던 충성스런 선조들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에게 창작의 힘을 불어넣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톨스토이를 세계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전쟁과 평화’에서는 외할아버지인 볼콘스키 공작과 톨스토이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실제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귀족 가문의 전통은 그의 사상과 문학에 좋은 재료가 되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톨스토이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가정교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게 된 요인은 명문가 후예라는 가문에 대한 자긍심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의 대화는 아이의 창의력을 높인다 어린 시절 톨스토이에게 아버지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그는 아버지의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매너, 균형 잡힌 체격, 재미있는 농담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톨스토이는 아버지가 푸슈킨의 ‘나폴레옹’ 등을 읽어주거나 식사 때 낱말 맞추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톨스토이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동화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또한 음악을 좋아해 점심식사 전과 저녁 다과시간 전에는 반드시 피아노를 치면서 집안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톨스토이가 음악과 노래에 흥미를 갖고 또 잘 이해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아이를 바꾼다 톨스토이는 19세부터 평생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의 일기 쓰기를 본받아 가족 모두가 일기를 썼다. 톨스토이 자신에게는 일기가 작품의 원천이 되었고,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이 중 일곱 개의 오이는 톨스토이 자녀들의 일기나 회고록에 빠짐없이 등장하곤 한다. 또 아침에 소설을 쓰기 전 아이들과 함께 체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벌을 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자율적인 교육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가장 옳은 최고의 인물이기 때문에 잘못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아이들은 아버지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톨스토이는 9명의 아이들을 직접 교육시켰는데, 아이들은 8시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9시부터 공부를 시작해 저녁 9시까지 수업을 받았다. 영국과 독일에서 데려온 가정교사에게 영어와 독일어를 배 우게 했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어머니에게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역사, 지리 등을 배웠다. 일주일에 두 번은 사제와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는 그림 과외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여느 아빠들처럼 아이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면 이내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결코 때리지는 않았다. ◈ 톨스토이가의 자녀교육 10훈 일기 쓰기 등 좋은 습관을 자녀와 함께 실천하고 싶은 부모들에게 1 매일 일기를 쓰며 반성하고 다짐하고 계획한다. 2 철저하게 계획표를 짜고 실천하도록 노력한다. 3 온 가족이 평생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갖는다. 4 어릴 때부터 책을 큰 소리로 읽는다. 5 음악과 미술에 대한 재능은 의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6 재능이 보이면 가정교사를 활용해 재능을 개발해준다. 7 외국어 공부는 현지인 가정교사에게 배운다. 8 아이가 어릴 때는 자주 같이 놀아주며 동화를 들려준다. 9 선조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문의 자긍심을 심어준다. 10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 앞장선다. 여성조선 |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명문가 자녀교육에는 뭔가 남다른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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