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첫 여성 ○○’의 함정

2007년 10월 세계 최고 명문 미국 하버드대가 역사학자 드루 길핀 파우스트 교수를 새 총장으로 맞이했다. 세계 언론이 ‘하버드의 첫 여성 총장’이라고 대서특필하자 파우스트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하버드대의 여성 총장이 아니라 그냥 ‘하버드대 총장’입니다.”

올해 세계 정치 및 경제계에서 ‘여성 파워’가 유난히 두드러졌다.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고 9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3연임에 성공했다. 다음 달 대선을 앞둔 칠레에서도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의 재선이 유력하다. 6월 러시아에서는 옐비라 나비울리나 대통령경제보좌관이 세계 주요 8개국(G8) 최초의 여성 중앙은행 총재가 됐다. 이달 9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차기 의장에 재닛 옐런 현 부의장이 임명됐다. 20일 이스라엘도 카르니트 플루그 현 부총재를 첫 여성 중앙은행 수장으로 임명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계 경제위기가 다시 발생하면 이를 해결할 5명의 핵심 인물 중 4명이 여성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냈다. WSJ가 지목한 5개 요직은 미국 대통령, 독일 총리, 미국 연준 의장,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다. 연준 의장, 독일 총리, IMF 총재는 이미 여성이 차지하고 있어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대통령에 나서 당선되면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를 제외한 모든 자리가 여성으로 채워진다는 얘기다.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때마다 등장하는 ‘첫 여성 ○○’ ‘여풍당당’ 같은 표현은 문제가 있다. 이들은 ‘여성’이기에 고위직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야에서 능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았기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첫 여성 ○○’으로만 부각하는 행위는 결례일 뿐 아니라 또 다른 남녀차별적 사고방식이다. 여성이 중요한 위치에 오르는 일이 이례적이고 드물다는 인식이 은연중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남편은 누구인지, 남편과 어떻게 결혼했는지, 이들의 옷과 장신구는 어떠한지에 관한 보도는 어떠한가. 읽다 보면 연예인의 ‘사생 팬(스타의 사생활까지 쫓아다니는 극성팬)’이 된 듯하다. 메르켈 총리는 재혼 후에도 이혼한 첫 번째 남편의 성을 쓰고 있다. 현 남편인 화학자 요아힘 자우어 박사는 아내의 정치활동에 개입하지 않을뿐더러 공식석상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르켈의 3연임이 확정된 후 일부 매체는 자우어 박사가 전처와의 사이에 2명의 아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의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둔 자식이 몇 명인지가 독일 총리의 국정 운영 능력과 무슨 상관인가.

이제 여성 리더가 등장할 때 ‘첫 여성 ○○ 탄생’이란 식상한 제목 대신 ‘○○ 분야에서 20년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라는 식으로 능력과 전문성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보고 싶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첫 여성 ○○ 탄생’이라는 기사가 사라질 때 이뤄지지 않을까.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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