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
물론 이러한 세간의 평판이 적절하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 학계가 아직도 세계를 이끄는 수준이 못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창출에서 남에게 뒤떨어지면 국가의 경쟁력도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한국 대학에서 지금 이루어지는 연구들이 우리 사회의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의 국가최고기술책임자(CTO)라고 할 수 있는 산업통상자원부 국가 연구개발 전략기획단장 박희재 교수가 “요즘 교수들은 자기 위한 연구만 하지 국가를 위한 연구는 하지 않는 것 같다”고까지 말했을까. 사실 대학 교수들의 연구활동이 자신들의 업적 쌓기에만 치우쳐 있고 학계나 사회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일이 많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연구가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어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 우선 양적 팽창을 벗어나 질적 도약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연구는 외형을 키우는 데 치중하는 일이 많았다. 논문이나 특허도 질에 관계없이 숫자를 채우는 것에 집착했고, 연구주제 또한 논문 내기 쉽고 연구비 따기 쉬운 유행을 따라가기 일쑤였다. 이러한 풍토는 계량적 지표를 중시하는 평가제도에 기인한 바 크지만 자신이 직접 개척해야 하는 험난한 길보다 남을 따라가는 편한 길을 택한 연구자들의 안이함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독창성이 생명이어야 할 학문 연구조차 ‘선도자(first mover)’보다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의 패턴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진정 자신만의 길을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노벨상도 나오고 남들이 기억하는 위대한 학자가 될 것이다.
둘째는 넓은 시각에서 전체를 보면서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엮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그동안의 발전을 통해 각 세부 학문분야의 전문성은 이제 상당히 확보되었다. 문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러한 세부 분야의 전문성을 묶어 미래사회의 큰 이슈에 도전해야 되는데, 그러한 경험이 없고 그러한 도전을 하는 자세도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만들었을 때 실제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최초로 사용한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대신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에 의존해 이미 존재하던 공학적 기술을 인문사회적 직관과 결합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냈던 것이 크게 성공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 예를 들어 에너지 문제라든가, 노령화 사회의 이슈는 이처럼 자연과학적인 전문성과 인문사회학적인 지식이 결합되어야 풀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많은 종합대학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세부 전문분야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학들은 이들의 전문성을 끌어모아 미래사회의 큰 이슈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각자 세부영역의 조그만 과제 연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이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고 다양한 전문성을 응집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는 국가 종합연구소로서 거듭날 때 그 힘은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think-tank)인 헤리티지 재단이나 브루킹스 연구소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처럼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싱크탱크들이 여럿 생겨 다양한 시각의 기초정책자료들을 제공한다면 선거 때마다 소수의 캠프 전문가들이 무리한 공약을 급조해 선거 후 공약이행에 차질이 생기는 문제도 상당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의 대학들은 지금 국내외의 추세변화에 따른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연구 또한 예외가 아니며, 이러한 도전에 개인의 창의성과 융합 정신으로 슬기롭게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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