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과학자로 인정받은 경우는 1976년 대한민국학술원 최초의 여성회원이 된 김삼순 박사(농학)가 처음이다. 과학 종주국으로 불리는 영국과 프랑스 과학계에서도 여성을 회원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인 게 100년도 안 된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과학자로 서울대 김빛내리 교수가 거론되면서 여성 과학자에 대한 위상이 한껏 높아지고 있다.
일단 여성 과학자 수가 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서 발행한 2011년도 연구개발활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구개발인력으로 구분되는 과학자 37만여 명 중 여성은 6만5000여 명으로 전체 과학자의 17.3%를 차지한다. 2006년 3만3000여 명이었으니 5년 만에 두 배가 된 셈. 같은 기간 남자가 약 40%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과학계의 여풍은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여성과학자 비율은 일본(13.8%)에 비해서는 높지만 영국(37.9%) 프랑스(26.9%) 독일(24.9%)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 “그래도 남자”
수는 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2011년도 연구개발활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연구과제책임자 중 여성 비율은 7.3%에 그친다.
여성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래도 남자”라는 현실이 팽배한 것이다. 여성 물리학자 A 교수는 “남성들 사이에선 여성들이 연구를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여성공학자 B 씨(연구교수·기업에서 최근 대학 연구교수로 자리를 옮겼다)도 “남자들은 여성 과학자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하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해 놓고는 업무 효율이 감소됐을 때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실제로 DNA가 이중나선 구조임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X선 회절 사진을 제공했으면서도 노벨상에서 제외된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경우도 비슷하다. DNA 구조가 이중나선으로 발견되는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제임스 왓슨의 책 ‘이중나선’에는 프랭클린이 머리가 비상하고 결정학자로서 전문가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여자’라거나 ‘주눅 들지 않는 연구 태도’를 지녔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분위기는 남성들도 인정한다. C 교수(화학공학)는 “여성 과학자 중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경우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많은데 이것은 동시에 공격적으로 비치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남성 물리학자 D 교수도 “여성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과학계 주류인 남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것 아니겠냐. 나도 아들은 걱정이 없는데 딸을 보면 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편견은 깨지는 중이다. 무엇보다 평가시스템이 정량적 지표로 바뀌면서 ‘능력 중심’으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BK사업이 공헌한 바 있다. 1999년부터 우수한 연구인력 양성을 위해 대학원생과 신진 연구인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BK사업에서는 연구 성과를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 특허, 논문의 피인용 정도 같은 객관적 성과를 지속적으로 평가해 사업단을 선정하고 평가했다.
E 교수(여·생명과학)는 “연구성과를 정량적 지표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부작용도 있지만 능력을 갖춘 여성 과학자가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 경력 단절 여성 과학자
과학자들은 ‘연구’를 ‘끝이 없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여성 생명과학자 F 씨(기업연구원)는 “논문에 들어가는 실험 데이터 사진 1장을 얻는 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며 “앉으나 서나,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실험 생각뿐”이라고 했다. 여성 물리학자 A 교수도 “연구는 결과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싸움이다. 연구를 안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 같지만 꾸준히 하지 않으면 본인도 모르게 밀려나기 쉬운 게 이 분야”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여성 과학자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은 결혼과 출산.
여성 수학자 G 씨(연구원)는 “두 아들을 돌봐주시던 친정 엄마가 아플 때 남편과 번갈아 휴가를 내고 친정 언니까지 모두 동원해 아이를 보살폈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남성 화학공학자 C 교수도 공학박사였던 아내가 대기업 연구원에서 9년간 근무하다 5년 전에 그만둔 사연을 이야기하며 “여성 과학자에게 양육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연구하라고 독려하기는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과 출산에 따른 경력 단절은 발전 속도가 빠른 과학계에선 치명적이다. 여성생명과학자 F 씨(기업연구원)는 “생명과학 분야는 특히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중간에 잠깐 쉬고 나면 연구 주제도 바뀌고 연구 방법도 바뀐 경우가 대부분이라 적응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년가량 쉬고 정부의 경력복귀지원사업으로 3년 계약직으로 복직한 H 씨(연구원)는 “육아나 출산으로 몇 년 공백을 가졌던 여성 과학자들이 다시 연구할 기회를 얻더라도 적응에 어려움을 느껴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일까. 과학계엔 독신 여성 과학자들이 꽤 눈에 띈다. 뛰어난 연구성과로 인정받는 한옥희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남편이나 아이들이 없으면 편하겠다고 말하지만 자연이 진공상태를 두지 않듯 삶도 빈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 애나 남편이 아닌 인생의 다른 숙제가 주어질 뿐이므로,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며 일희일비할 필요를 못 느낀다”며 웃었다.
무조건 출산과 육아 탓만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여성 물리학자 A 교수는 “결혼, 출산, 자녀가 걸림돌인 것은 사실이나 애가 공부 못하면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집안일도 온전히 자기 일로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여성의 경우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 절박함이 남성에 비해 부족한 측면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 과학계 유리천장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에서 발행한 2011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합해 여성 과학자는 이공계 대학에서 23.8%, 공공연구기관에서 19.4%, 민간기업 연구기관에서 11.2%를 차지한다. 여성생명과학자 F 씨(기업연구원)는 “기업이 대학보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강도가 크기 때문에 대체로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여성 과학자의 수는 늘고 있지만 고위직 남성 쏠림은 과학계도 마찬가지다. 2011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자료에 따르면 공공연구기관에서 책임자급 이상 여성 과학자 비율은 4.9%, 민간기업 연구기관에서 책임자급 여성 과학자는 3.6%에 불과하다. 기업의 경우 연구책임자나 임원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과거보다 늘고 있지만 남성에 비해 그 자리를 지키는 기간이 짧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 공학자 B 씨(연구교수)는 “연구책임자나 임원이 되면 추진력과 리더십이 필요한데 네트워크나 정보 교류가 활발하지 않고, 리더로서의 경험이 부족한 여성들이 강력한 성과를 만들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을 지내고 현재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인 정광화 박사는 “여성 과학자들은 출세욕보다는 성취욕이 더 높다. 리더십을 성별 차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개인 차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며 “리더로서 갖춰야 할 제1덕목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일하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결국 자기 일을 좋아해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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