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Science Times |
우리 주위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 교수는 이날 ‘정치와 기록문화에 담긴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는데, 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논어의 첫머리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인용하면서 공자는 인생의 즐거움이 두 가지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공부이고, 두 번째는 친구이다. 그런데 이런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만큼 교육열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를 이끌어 온 것은 선비문화의 교육열
조선시대 관료를 선발하는 인사정책에는 큰 원칙이 있었다. 인재를 공정하게 선발한다는 공선(公選)이 그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공선인가? 이른바 입현무방(立賢無方), 유재시용(惟才是用)이 공선이다.
입현무방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서는 모가 나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여기서 ‘모가 난다’는 말은 혈연이나 친척, 지연, 학연을 따져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모가 나면 어진 사람을 등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재시용은 ‘오직 재주 있는 사람을 쓴다'는 뜻으로, 요즘 말로 하면 전문성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용어를 합쳐서 해석하면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공선이라는 뜻이다. 공선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이 과거제도(科擧制度)이다
신분적인 제약은 없었는가? 노비(奴婢)는 응시가 불가능했지만 양인(良人)은 죄인이 아닌 한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거의 모두 양반인 것처럼 생각해 왔으나, 그것은 근거 없는 주장임이 드러났다.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도 문과급제자가 나와 정승(政丞)과 판서(判書)가 부지기수로 배출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들 가운데 그런 인물이 적지 않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스스로 양반의 후예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비도 단계적으로 해방되어 양인(良人)이 되면 과거응시가 가능했고, 크든 작든 벼슬아치가 나오지 않은 집안이 없다. 그러니 한국인 전체가 양반의 후손이다. 다만, 벼슬아치를 얼마나 많이 배출했느냐를 가지고 명족(名族)이냐 아니냐를 따질 뿐이다.
오늘날 과거제도는 없어졌지만 한국처럼 신분이동이 활발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러한 사회적 역동성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단 조선시대에만 과거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라시대에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것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과거제도가 시행돼 교육열이 더욱 높아졌다. 고려 사람들은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으며, 여염과 누항(陋巷)에도 학교(經館과 書社)가 즐비하고, 귀족과 평민, 병졸(兵卒)을 가리지 않고 선생을 찾아가 공부하는 열기를 보였다.
한민족의 교육열은 과학기술로 이어져
궁중에는 수 만권의 장서 있어서 원로학자들이 공부에 매진했다. 고려 말에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금속활자(1234년)를 만든 것은 이러한 고려인의 치열한 교육열에 부응하여 다양한 책을 발간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다. 인종(仁宗) 때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소개한 내용들이다.
한국의 과학기술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은 교육과 관계되는 분야였다. 금속활자의 발명이 그렇고, 인쇄술(印刷術)이 그렇고, 제지술(製紙術)이 그렇고, 붓과 먹도 최상품을 생산했다. 조선의 종이는 질기고 윤기가 뛰어나서 등피지(等皮紙), 또는 경면지(鏡面紙)로 불리고, 중국에 수출한 조공품(朝貢品)의 주종을 이루었다.
종이를 이용하여 갑옷(紙甲)과 대포(紙砲)를 만들기도 하고, 내구성이 뛰어나서 천년지(千年紙)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중국 책과 조선 책을 비교하면, 종이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개화기에도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교육열에 한결같이 감탄을 보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군인은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에 6천 권의 방대한 책이 있고, 농촌가옥에도 책이 없는 집이 없고, 글을 모르는 사람을 멸시하는 풍습이 있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일이 있었다, 프랑스 농촌에 책이 없을 뿐 아니라 글을 모르는 사람을 멸시하는 풍습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한론의 유키치도 “조선의 글 읽는 풍습 배워야”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인물이지만, 조선인의 글 읽는 풍습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싸움만 즐기는 일본인과 달리 조선 사람은 집집마다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힘으로 강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화가 앞선 한국인의 자존심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총력을 기울여 한국인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한국사를 비참한 역사로 비틀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배우면서 한국사를 비참한 역사로 보는 잘못된 사관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왔던 것이다.
▲ 과거의 선비들은 집안에서 책을 읽는 것메 그치지 않았다. 산천경계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좋은 선비들과 인생과 자연을 토론하며 삶의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
개화기에 동양 3국을 여행한 어느 서양인은 한국, 중국, 일본의 차이를 지적하여, 중국은 '상인의 나라', 일본은 '무사의 나라', 조선은 '학자의 나라'로 불렀다. 실제로 개화기 조선정부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신식학교를 직접 세우거나 지원했다. 이때 양성한 인재들이 광복 후 대한민국 교육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원초적 가치관인 선비정신을 종교, 철학, 윤리, 예술, 정치, 기록문화 등으로 나누어 차례로 살펴보았다. 강연자의 문제의식은 강의 첫머리에 말했듯이 한국사의 왕조가 500년 또는 그 이상 장수한 비결이 선비정신에 있었다는 점이다.
각 종교의 융합 속에서 선비문화가 탄생
선비정신의 핵심은 ‘명사랑에서 출발한다. 천지인(天地人)으로 구성된 우주는 모두가 음양오행을 내포한 생명체로서 서로 상생하는 공동체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주에 충만 된 생명체의 기본질서인 사랑을 가지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데에서 행복이 온다고 보았다. 그 행복을 ‘신바람’, ‘신명’, ‘흥’이라고 불렀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면 우주의 일부인 인간사회도 당연히 하나의 생명공동체와 사랑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그 사랑공동체를 표현하는 윤리적, 정치적 언어가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고, '공익정치(公益政治)'이고, '인정(仁政)'이고, '민본정치(民本政治)'이다. 그리고 사랑은 '나눔'에서 오고, 나눔이 곧 '정(情)'으로 보았다.
선비정신의 출발은 무교(巫敎: 神敎, 仙敎)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불교가 융합되고, 유교가 융합되면서 단계적인 진화의 과정을 걸어갔다. 불교와 유교는 표면적인 언어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무교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화, 토착화의 길을 걸으면서 한국인의 체질로 굳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똑같이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어도 중국인과 일본인과 한국인은 체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서양의 역사는 좋게 보면 진취적이지만, '생명'과 '평화'의 논리에서 보면, '반생명적'이고, '반평화적'인 정복과 전쟁의 길을 많이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비서양권이 그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문화나 이슬람문화도 개인의 평화에는 기여했는지 모르나 세계평화에는 얼마나 기여했는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서양문화의 기여는 차라리 과학과 기술의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서구문화가 기여한 점도 바로 과학과 기술에서 찾는 것이 온당하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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