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 '쌍벽' 지젝 vs 바우만

한 달에 한 권꼴 번역되는 '바우만', '열린 마르크시즘'으로 평가받아
다양한 주제로 多作… 글도 잘 읽혀 人文書에 목마른 독자 사로잡아
2000달러였던 선인세도 5배 껑충
'리퀴드 러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방황하는 개인들의 시대' '유행의 사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한 사회학자의 책이 지난 4월부터 매달 한 권꼴로 번역돼 나오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Bauman·88). 1925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하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反)유대주의에 떠밀려 조국을 떠났고, 이스라엘을 거쳐 영국에 정착한 '경계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왜 바우만이 읽힐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 이어 오는 10월 '부수적 피해'(가제)를 번역해 내놓을 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바우만이 말한 '리퀴드 모더니티(liquid modernity·유동적 현대성)'가 잘 드러나는 사회라 특별한 울림을 준다"면서 "바우만은 다작(多作)에 관심사가 다양하며 글이 쉽다. '바우만이라는 산'에 오르는 코스가 완만하고 여러 갈래라 더 주목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안정한 사회, 불평등한 삶

'리퀴드'는 바우만의 이론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고정돼 있지 않고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현대 사회를 지칭한다. 자본과 노동이 한 장소에 견고하게(solid) 매여 있던 세상은 갔다. 세계화 시대에 자본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노동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해 불확실성, 불평등이 확대된다. '리퀴드'는 전 지구적이면서 개인적인 현상이다. 저서 '액체 근대'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썼다. "개인은 국가와 사회가 옭아맸던 속박을 깨고 자유를 얻었지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는 영국 가디언지(紙) 인터뷰에서 "우리 문명, 이 질서정연해 보이는 세계는 사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얇은 빙판 위에 있다"면서 "테러, 집단 학살, 신종 독감, 쓰나미 같은 재앙의 공포가 상존한다"고 말했다. 유럽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젊은 세대는 긴 실업과 형편없는 일자리, 신분 하강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 있고 희망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에 번역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더 냉엄하게 자본주의를 진단한다. 상층의 부(富)가 하층까지 윤택하게 한다는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재산이 가난한 25억명의 재산을 합친 것의 갑절인데 빈부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며 성장과 소비, 경쟁은 필수불가결하다는 믿음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면서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인용한다. "부자들은 담장 공동체에 살면서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최고 의료 혜택을 받는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불안 속에 평범한 교육과 배급제와 다름없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

◇변화를 읽어내는 눈과 성찰

바우만은 교조적 마르크시즘과는 다른 '열린 마르크시즘' 계열로 출발했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그람시, 짐멜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끊임없이 주변에서 접근하려고 한 사회학자"라면서 "현실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고 변화를 잘 읽어낸다"고 평했다. 영국 좌파로부터 '배반자'로도 불렸지만,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이라는 마르크시즘으론 보이지 않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독창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1992년 유럽의 권위 있는 학술상 '아말피 상'을 차지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그의 핵심 저작으로 꼽힌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와 결혼한 바우만은 이 책에서 홀로코스트를 극단적 비극으로 덮어두지 않고 현대와 대면시켰다. "홀로코스트는 문명의 실패가 아니라 현대성(관료화된 문명)이 낳은 것이며 적당한 조건만 갖춰지면 무한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진정 위험한 것은 홀로코스트가 잊히는 게 아니다. 기념비에 둘러싸인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죄를 사면해주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사실이다."

◇40~50대가 바우만을 읽는다

바우만의 글쓰기는 비유가 돋보이는 에세이에 가깝다. 가령 '평균화의 맹점'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다리의 수송력은 여러 교각이 지닌 힘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의 힘에 좌우된다. 어떤 사회의 건강도 국민총생산(GNP)으로 측정해서는 안 되고 가장 가난한 계층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

지난 15~16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청년 인문학 캠프'에는 바우만과 슬라보예 지젝의 인터뷰 영상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다. 인디고서원 박용준 편집장은 "바우만의 경우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안고 있는 불안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성찰 때문인지 호응이 뜨거웠다"고 했다.

독자는 누구일까. 홍미옥 새물결 대표는 "'리퀴드 러브'의 경우 40대가 가장 많고 50대, 30대 순이며 남녀가 비슷하다"면서 "짧은 상품 순환주기로 지탱되는 소비사회, 난파당하는 고독한 개인, 쓰고 버려지는 삶에 대한 진단에 공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번역서가 줄을 잇는 '바우만 현상'이 "당장 지식인 사회에서 회자되고 1년에 5000부 이상 판매될 만한 인문학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2000달러였던 바우만의 '글값(선인세)'은 최근 1만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서예 같은 바우만, 팝아트 같은 지젝]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4)을 향한 쏠림도 뜨겁다. 그의 책도 올 들어 5종 번역돼 나왔다.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같은 저서 목록만 봐도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답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지젝과 바우만은 사뭇 다르다. 임지현 교수는 "지젝은 탁월한 분석가지만 어떤 이야기를 할 때는 완고하고 답답한 마르크스주의자가 튀어나온다"면서 "바우만은 훨씬 열려 있다"고 했다. 지젝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공산주의 실험은 파국으로 끝났지만 자본주의가 고치지 않고도 계속 작동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면서 '전체주의와는 다른 강력한 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글쓰기도 다르다. 지젝이 총천연색이라면 바우만은 붓글씨 같다. 정일준 교수는 "지젝이 영상문법까지 동원해 현학적인 글을 쓴다면 바우만의 글쓰기는 한 문장에 세계를 담는 아포리즘(경구·警句)"이라고 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