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신사가 추운 겨울 날 닭 속에 눈을 집어넣습니다. 눈과 같이 차가운 것이 고기를 부패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그만 폐결핵에 걸려 죽고 맙니다.
이것이 영국 경험론 철학을 세운 프랜시스 베이컨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과학적 방법론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순수한 철학 정신을 높이 살만합니다.
베이컨은 왕의 옥쇄를 담당하는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를 향한 강한 권력의지를 보였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정부에 천거해 준 후원자가 왕에 대한 역적모의에 가담한 혐의를 받게 됐습니다. 베이컨은 그 사건을 조사하는 자리에 임명돼 유죄를 끌어냅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한 일이 아니냐’는 시선 때문에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자신 또한 뇌물 혐의로 런던탑에 있는 감옥에 감금됩니다. 불과 사흘 뒤 풀려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그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치명타를 입은 뒤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삶을 살았던 셈입니다.
꿀벌은 진정한 경험론자의 상징
과학적 방법론을 새로이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그는 인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단논법과 같은 연역법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결론)”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연역법에 기초한 삼단논법입니다. 베이컨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대전제입니다.
만약 대전제가 참이라면 모든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런 엄청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베이컨은 우리에게 중간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소전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베이컨은 이 말을 통해 과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성립하고자 합니다. 경험에 기초한 앎만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이 선순환 구조에 들어가게 되면 지식의 확장은 급속하게 이뤄집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경험·관찰·실험을 중시하는 과학적 태도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인류의 생산성을 하루아침에 10배 이상 올려놓는 것은 과학의 위대한 성과입니다.
베이컨은 ‘인간은 모든 지식을 타고 태어난다’는 합리론을 비판합니다. ‘지식은 경험을 통해 축적하게 된다’는 경험론을 옹호합니다.
그는 거미·개미·꿀벌의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폅니다. 거미는 자신의 뱃속에서 실을 짜내 집을 짓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립니다. 개미는 밖에 있는 먹이를 부지런히 모아다가 쌓아 놓습니다.
새롭게 가공하는 것 없이 그것을 먹습니다. 반면에 꿀벌은 바깥에 있는 재료를 자신이 스스로 뱃속에서 가공해 유용한 꿀의 형태로 만들어 놓습니다. 거미는 합리론자, 개미는 소박한 경험론자인 반면 꿀벌이야말로 제대로 된 경험론자입니다. 베이컨이 추구하는 과학적 지식은 바로 꿀벌의 꿀인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는 꿀벌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꿀 생산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꿀 좀 적게 먹으면 그만이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은 지구상 식물의 2세 번식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꿀벌들의 몫이라는 사실에서 도래합니다. 다른 어떤 동식물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꿀벌입니다. 꿀벌은 자신들이 원하는 꿀을 생산하기 위해 식물들이 스스로 하지 못하지만 절대적으로 원하는 번식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윈-윈입니다.
꿀벌이 사라지게 되면 대체 방법이 없는 한 식물들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꿀벌이 사라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쓰고 있는 휴대전화와 같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전자파가 한 원인입니다. 또 식량 증산을 위해 사용하는 농약이 다른 원인입니다.
말벌을 본 적이 있나요. 꿀벌보다 적어도 5~6배는 큰 이 말벌이 꿀벌 집을 습격합니다. 꿀도 먹고 꿀벌도 먹어치우기 위해서죠. 이 말벌의 습격에 꿀벌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꿀벌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 반격에 나서 말벌을 죽일까요. 꿀벌들이 말벌을 일단 빙 둘러 포위합니다. 그리고 날갯짓으로 온도를 급상승시킵니다.
섭씨 영상 45도가 되면 말벌이 죽습니다. 말벌이 열에 약하다는 것을 아는 꿀벌들이 벌이는 협동 작전입니다. 일단 말벌이 죽고 나면 다시 날갯짓으로 온도를 낮춥니다. 48도가 되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날갯짓으로 온도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영국 경험론 철학을 세운 프랜시스 베이컨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과학적 방법론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순수한 철학 정신을 높이 살만합니다.
베이컨은 왕의 옥쇄를 담당하는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를 향한 강한 권력의지를 보였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정부에 천거해 준 후원자가 왕에 대한 역적모의에 가담한 혐의를 받게 됐습니다. 베이컨은 그 사건을 조사하는 자리에 임명돼 유죄를 끌어냅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한 일이 아니냐’는 시선 때문에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자신 또한 뇌물 혐의로 런던탑에 있는 감옥에 감금됩니다. 불과 사흘 뒤 풀려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그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치명타를 입은 뒤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삶을 살았던 셈입니다.
꿀벌은 진정한 경험론자의 상징
과학적 방법론을 새로이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그는 인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단논법과 같은 연역법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결론)”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연역법에 기초한 삼단논법입니다. 베이컨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대전제입니다.
만약 대전제가 참이라면 모든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런 엄청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베이컨은 우리에게 중간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소전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베이컨은 이 말을 통해 과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성립하고자 합니다. 경험에 기초한 앎만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이 선순환 구조에 들어가게 되면 지식의 확장은 급속하게 이뤄집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경험·관찰·실험을 중시하는 과학적 태도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인류의 생산성을 하루아침에 10배 이상 올려놓는 것은 과학의 위대한 성과입니다.
베이컨은 ‘인간은 모든 지식을 타고 태어난다’는 합리론을 비판합니다. ‘지식은 경험을 통해 축적하게 된다’는 경험론을 옹호합니다.
그는 거미·개미·꿀벌의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폅니다. 거미는 자신의 뱃속에서 실을 짜내 집을 짓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립니다. 개미는 밖에 있는 먹이를 부지런히 모아다가 쌓아 놓습니다.
새롭게 가공하는 것 없이 그것을 먹습니다. 반면에 꿀벌은 바깥에 있는 재료를 자신이 스스로 뱃속에서 가공해 유용한 꿀의 형태로 만들어 놓습니다. 거미는 합리론자, 개미는 소박한 경험론자인 반면 꿀벌이야말로 제대로 된 경험론자입니다. 베이컨이 추구하는 과학적 지식은 바로 꿀벌의 꿀인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는 꿀벌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꿀 생산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꿀 좀 적게 먹으면 그만이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은 지구상 식물의 2세 번식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꿀벌들의 몫이라는 사실에서 도래합니다. 다른 어떤 동식물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꿀벌입니다. 꿀벌은 자신들이 원하는 꿀을 생산하기 위해 식물들이 스스로 하지 못하지만 절대적으로 원하는 번식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윈-윈입니다.
꿀벌이 사라지게 되면 대체 방법이 없는 한 식물들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꿀벌이 사라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쓰고 있는 휴대전화와 같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전자파가 한 원인입니다. 또 식량 증산을 위해 사용하는 농약이 다른 원인입니다.
말벌을 본 적이 있나요. 꿀벌보다 적어도 5~6배는 큰 이 말벌이 꿀벌 집을 습격합니다. 꿀도 먹고 꿀벌도 먹어치우기 위해서죠. 이 말벌의 습격에 꿀벌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꿀벌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 반격에 나서 말벌을 죽일까요. 꿀벌들이 말벌을 일단 빙 둘러 포위합니다. 그리고 날갯짓으로 온도를 급상승시킵니다.
섭씨 영상 45도가 되면 말벌이 죽습니다. 말벌이 열에 약하다는 것을 아는 꿀벌들이 벌이는 협동 작전입니다. 일단 말벌이 죽고 나면 다시 날갯짓으로 온도를 낮춥니다. 48도가 되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날갯짓으로 온도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관찰과 공유 중시하는 ‘소통의 리더십’
꿀벌은 어떻게 꿀을 생산할까요. 꿀벌의 날갯짓에 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꿀벌은 꿀을 절대 혼자 먹지 않습니다. 일단 꿀벌들이 밖에 나가 꿀을 발견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동료 꿀벌들에게 꿀이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춤을 추면서 가르쳐 줍니다.
다른 꿀벌들은 그 춤추는 동작과 날갯짓의 모양을 보고 그러한 정보를 공유합니다. 날갯짓의 소통의 의미는 ‘꿀벌은 절대 꿀을 혼자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차피 혼자 다 먹지 못할 꿀이라도 혼자 다 먹으려고 하는 인간들이 배워야 할 소통의 철학을 꿀벌들은 이미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탄생한 이후 오늘까지 태양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떠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은 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내일 태양이 뜨지 않을 것이라는 데 도박을 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태양이 뜰 것이다’라는 명제는 귀납법에서 온 진리입니다. 따라서 영구불변한 진리는 아닙니다.
우주 천문학자들은 지금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고 말 합니다. 물론 왜 팽창하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존재하는 것의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인간은 꿀벌을 죽일 것이 아니라 꿀벌에게서 소통을 배워야 합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소통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지식을 공유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에서 벗어나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소통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경제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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