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 (1859 ~ 1941)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앙리 베르그송은 19세기에 그 발단이 마련된 생성존재론(ontology of becoming)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현대 철학의 초석을 마련한 거장이다. 베르그송이 니체에 의해 마련된 ‘생성의 무죄’라는 테마를 탄탄한 철학사적·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엄밀한 형태로 벼려냄으로써 20세기의 형이상학·존재론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같은 거장들로 이어져 왔다.
베르그송 사유의 강점은 그가 그의 실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유하거나 시대의 분위기에 들어맞는 사유를 하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정향을 가지고서 사유하기보다는, 학문의 역사 전체를 그 근저에서 검토하고 새로운 학문 전반을 정초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가설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사유의 잘 알려진 측면들보다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가설인 ‘지속’ 개념에 도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베르그송은 어느 날 제논의 패러독스를 강의하고서 학생들과 산책하던 어떤 순간에 ‘지속’이란 생각이 떠올랐다고 스스로 회상하고 있다. 그는 이때 서양 학문의 역사에서 시간 개념은 늘 공간 개념으로 환원되어 이해되어 오지 않았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논의 패러독스가 어떻게 그의 이런 생각을 일깨웠을까?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했던 엘레아학파의 일원이었던 제논은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가설, 즉 다자성(multiplicity)과 운동·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논증하고자 그의 패러독스(역설)들을 개발해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패러독스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경주를 한다. 거북이 아킬레우스보다 더 앞에서 출발할 경우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결코 추월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거북이 있던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 그런데 거북이 아무리 느리다 한들 그 사이에 조금은 앞으로 갔을 것이다. 발빠른 아킬레우스라 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달릴 수는 없다. 그 역시 아무리 작은 시간이라도 일정한 시간을 거쳐야 거북이 있던 곳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거북이 아무리 느린들 아무리 작은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그 사이 조금은 앞으로 갈 것이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다.
제논은 왜 이 맹랑한 역설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다자성과 운동·변화를 인정할 경우, 바로 위와 같은 역설이 초래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논증은 이른바 ‘귀류법(歸謬法)’이라 불린다. “√2는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를 봤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증명한다. “√2를 유리수라 해 보자, 그러면 ~한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2는 무리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제논은 “다자성과 운동·변화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우와 같은 모순(눈으로 봤을 때는 따라잡는데, 위의 논리로 보면 따라잡지 못한다는)이 생긴다. 그러므로 다자성과 운동·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제논의 패러독스는 수학자나 철학자라면 반드시 한번은 마주쳐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근대 이후에도 물리학자, 수학자, 형이상학자가 이 패러독스를 풀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미적분’이라는 빼어난 수학적 도구가 발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해법은 긴 논증이나 복잡한 수식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명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때로 단 하나의 생각의 전화가 거대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베르그송이 볼 때 패러독스의 해결은 간단하다. 제논은 시간을 공간화해 논증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은 현실 속에서 운동·변화하고 있고 그 시간은 연속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이를 종이 위의 공간에 놓고서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논증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시간을 왜곡하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종이 위에다가 수식을 적으면서 이 패러독스를 해결코자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 자체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정지되어 공간 위에 표상될 수도 없고, 불연속적으로 분할될 수도 없으며, 오려 붙이는 등의 조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절대 연속성이며 그 어디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며 절대적 생성이다.
베르그송은 서구의 철학이 시간의 본성을 오래도록 망각해 왔다고 말한다(후에 하이데거는 이를 이어서 ‘존재 망각’을, 들뢰즈는 ‘차이 망각’을 논하게 된다). 제논의 역설에서 나타난 다자성과 운동·변화의 부정은 물론 그 후에 극복되지만, 그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고도 길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과학철학적 판본이라 할 에밀 메이에르송은 과학의 영역에서도 ‘동일성의 사유’가 19세기까지도 지배해 왔음을 분석했다. 베르그송 역시 고전 역학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은, 흔히 고중세의 사유와 대비적으로 논의되지만, 사실 그 존재론적 근저에서는 플라톤의 그림자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근세 수학이 미적분을 발명한 것에는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미적분은 ‘연속적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상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고대 과학에서는 연속적 운동을 표상할 수 없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개념을 통해서, 운동의 시작점과 끝점에 초점을 맞추어 다룰 수 있었을 뿐이다. 미적분은 14세기에 활동한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들에 의해 기초가 놓이고, 17세기에 이르러 라이프니츠와 뉴턴에 의해 각각의 방식으로 창시됐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무한소미분’을 통해서 연속적 운동, 순간 가속도 등이 수학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한소미분은 운동의 연속성과 시간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볼 때 이 역시 시간의 공간화와 양화(quantification)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베르그송이 볼 때 수학은 세계를 양적 관점에서만 표상할 뿐 그 질적 변화를 포착하지는 못한다. 근대 철학자들은 ‘제1 성질들’(양적·기하학적 존재들)과 ‘제2 성질들’(맛, 소리 등 좁은 의미에서의 성질들)을 구분하면서 ‘제1 성질들’만이 실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제2 성질들이야말로 오히려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이며, 제1 성질들은 오히려 추상물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매우 복잡한 존재론적 논변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지만, 베르그송의 사유에서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며 근대 철학으로부터 현대 철학이 변별되어 나오는 핵심적인 지점들 중 하나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자신에게 미적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적 미적분’임을 언급한다.
베르그송이 근대 과학을 넘어 세계의 질적 파악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간주하는 두 과학은 열역학과 진화론이다. 열역학 제1 법칙,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여전히 엘레아적 그림자 아래에 있다. ‘보존’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일성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 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우주의 모든 것들은 등질화되며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는 법칙)은 우주 전체가 흘러가는 ‘시간의 방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베르그송은 이 법칙을 “모든 물리학 법칙들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법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열역학 제2 법칙과 진화론은 정확히 대조된다. 진화론은 오히려 우주 전체가, 적어도 지구 전체가 생명체들이 점차 ‘다질성’을 획득해 온 역사였음을 보여주기에 말이다. 열역학이 말하는 세계와 진화론이 말하는 세계가 대조되는 지점에서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유명한 정의가 나온다.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베르그송은 이 두 과학적 성과를 종합해서 우주의 생성을 ‘생명과 물질의 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질적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를 정립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 하나가 남았다. 베르그송은 기존의 질적인 사유들 또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대전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세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도 세계 그 ‘전체’는 일정하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베르그송은 이 전제조차도 벗어나야, 즉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질적 탄생이 항상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곧 ‘창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걸 알아야만 우리는 시간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렇게 발견된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기초로 전개된다.
경향신문
베르그송 사유의 강점은 그가 그의 실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유하거나 시대의 분위기에 들어맞는 사유를 하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정향을 가지고서 사유하기보다는, 학문의 역사 전체를 그 근저에서 검토하고 새로운 학문 전반을 정초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가설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사유의 잘 알려진 측면들보다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가설인 ‘지속’ 개념에 도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베르그송은 어느 날 제논의 패러독스를 강의하고서 학생들과 산책하던 어떤 순간에 ‘지속’이란 생각이 떠올랐다고 스스로 회상하고 있다. 그는 이때 서양 학문의 역사에서 시간 개념은 늘 공간 개념으로 환원되어 이해되어 오지 않았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논의 패러독스가 어떻게 그의 이런 생각을 일깨웠을까?
제논은 왜 이 맹랑한 역설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다자성과 운동·변화를 인정할 경우, 바로 위와 같은 역설이 초래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논증은 이른바 ‘귀류법(歸謬法)’이라 불린다. “√2는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를 봤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증명한다. “√2를 유리수라 해 보자, 그러면 ~한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2는 무리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제논은 “다자성과 운동·변화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우와 같은 모순(눈으로 봤을 때는 따라잡는데, 위의 논리로 보면 따라잡지 못한다는)이 생긴다. 그러므로 다자성과 운동·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제논의 패러독스는 수학자나 철학자라면 반드시 한번은 마주쳐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근대 이후에도 물리학자, 수학자, 형이상학자가 이 패러독스를 풀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미적분’이라는 빼어난 수학적 도구가 발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해법은 긴 논증이나 복잡한 수식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명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때로 단 하나의 생각의 전화가 거대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베르그송이 볼 때 패러독스의 해결은 간단하다. 제논은 시간을 공간화해 논증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은 현실 속에서 운동·변화하고 있고 그 시간은 연속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이를 종이 위의 공간에 놓고서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논증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시간을 왜곡하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종이 위에다가 수식을 적으면서 이 패러독스를 해결코자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 자체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정지되어 공간 위에 표상될 수도 없고, 불연속적으로 분할될 수도 없으며, 오려 붙이는 등의 조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절대 연속성이며 그 어디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며 절대적 생성이다.
베르그송은 서구의 철학이 시간의 본성을 오래도록 망각해 왔다고 말한다(후에 하이데거는 이를 이어서 ‘존재 망각’을, 들뢰즈는 ‘차이 망각’을 논하게 된다). 제논의 역설에서 나타난 다자성과 운동·변화의 부정은 물론 그 후에 극복되지만, 그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고도 길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과학철학적 판본이라 할 에밀 메이에르송은 과학의 영역에서도 ‘동일성의 사유’가 19세기까지도 지배해 왔음을 분석했다. 베르그송 역시 고전 역학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은, 흔히 고중세의 사유와 대비적으로 논의되지만, 사실 그 존재론적 근저에서는 플라톤의 그림자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근세 수학이 미적분을 발명한 것에는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미적분은 ‘연속적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상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고대 과학에서는 연속적 운동을 표상할 수 없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개념을 통해서, 운동의 시작점과 끝점에 초점을 맞추어 다룰 수 있었을 뿐이다. 미적분은 14세기에 활동한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들에 의해 기초가 놓이고, 17세기에 이르러 라이프니츠와 뉴턴에 의해 각각의 방식으로 창시됐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무한소미분’을 통해서 연속적 운동, 순간 가속도 등이 수학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한소미분은 운동의 연속성과 시간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볼 때 이 역시 시간의 공간화와 양화(quantification)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베르그송이 볼 때 수학은 세계를 양적 관점에서만 표상할 뿐 그 질적 변화를 포착하지는 못한다. 근대 철학자들은 ‘제1 성질들’(양적·기하학적 존재들)과 ‘제2 성질들’(맛, 소리 등 좁은 의미에서의 성질들)을 구분하면서 ‘제1 성질들’만이 실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제2 성질들이야말로 오히려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이며, 제1 성질들은 오히려 추상물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매우 복잡한 존재론적 논변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지만, 베르그송의 사유에서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며 근대 철학으로부터 현대 철학이 변별되어 나오는 핵심적인 지점들 중 하나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자신에게 미적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적 미적분’임을 언급한다.
베르그송이 근대 과학을 넘어 세계의 질적 파악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간주하는 두 과학은 열역학과 진화론이다. 열역학 제1 법칙,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여전히 엘레아적 그림자 아래에 있다. ‘보존’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일성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 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우주의 모든 것들은 등질화되며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는 법칙)은 우주 전체가 흘러가는 ‘시간의 방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베르그송은 이 법칙을 “모든 물리학 법칙들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법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열역학 제2 법칙과 진화론은 정확히 대조된다. 진화론은 오히려 우주 전체가, 적어도 지구 전체가 생명체들이 점차 ‘다질성’을 획득해 온 역사였음을 보여주기에 말이다. 열역학이 말하는 세계와 진화론이 말하는 세계가 대조되는 지점에서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유명한 정의가 나온다.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베르그송은 이 두 과학적 성과를 종합해서 우주의 생성을 ‘생명과 물질의 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질적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를 정립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 하나가 남았다. 베르그송은 기존의 질적인 사유들 또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대전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세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도 세계 그 ‘전체’는 일정하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베르그송은 이 전제조차도 벗어나야, 즉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질적 탄생이 항상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곧 ‘창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걸 알아야만 우리는 시간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렇게 발견된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기초로 전개된다.
베르그송을 더 알고 싶다면
베르그송의 저서를 통해 그 철학의 전체적 정향이나 분위기를 알려면 <사유와 운동>(이광래 옮김, 종로서적)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가 베르그송 이해에 도움을 준다. 베르그송의 철학사 해석은 <창조적 진화>(황수영 옮김, 아카넷) 4장을 보면 된다. 서구 철학사에서 베르그송의 위상에 대해서는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정우 지음, 한길사)을 보라.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최화 옮김, 아카넷) 2장은 ‘질적 다양체’ 개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이다. <물질과 기억>(박종원 옮김, 아카넷)은 최근에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베르그송의 저작이다. 들뢰즈의 <시네마>와 함께 읽는 것이 좋다. 해설서로는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황수영 지음, 그린비)이 있다. <창조적 진화>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베르그송 철학의 귀결점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잠재적 무의식>(김재희 지음, 그린비)은 베르그송 철학 전반에 대한 좋은 연구서이다.
베르그송의 저서를 통해 그 철학의 전체적 정향이나 분위기를 알려면 <사유와 운동>(이광래 옮김, 종로서적)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가 베르그송 이해에 도움을 준다. 베르그송의 철학사 해석은 <창조적 진화>(황수영 옮김, 아카넷) 4장을 보면 된다. 서구 철학사에서 베르그송의 위상에 대해서는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정우 지음, 한길사)을 보라.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최화 옮김, 아카넷) 2장은 ‘질적 다양체’ 개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이다. <물질과 기억>(박종원 옮김, 아카넷)은 최근에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베르그송의 저작이다. 들뢰즈의 <시네마>와 함께 읽는 것이 좋다. 해설서로는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황수영 지음, 그린비)이 있다. <창조적 진화>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베르그송 철학의 귀결점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잠재적 무의식>(김재희 지음, 그린비)은 베르그송 철학 전반에 대한 좋은 연구서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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